모든 시대의 위대한 영적 사상가들이 천둥 같은 목소리로 경고하던 말씀이 요즈음 새삼 사무친다.
“하느님을 찾아라, 행복이 아니라!”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지않는건 고사하고 한술 더 뜨는 형국이다. 사사로운 욕심의 만족을 행복이라 궤변을 늘어놓으며, 하느님은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강변한다.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처음부터 하느님을 찾은 게 아니라 행복을 찾았던 것 아닐까? 그것도 진복팔단의 행복이 아니라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낭비해야 하는 행복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너희가 이미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를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했는데. 참존재요 진리인 하느님을 어렴풋이 라도 보지 못하고 소문만 듣고 따라나선 귀결이 아닐까!
존재자체에서 우러나오던 빛 앞에 선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기억은 생생하다. 그 빛은 어둡고 밝은 빛이었으며, 따뜻하면서 꿰뚫는 빛이라고 형용모순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빛 앞에 선 나의 존재는 그야말로 구멍이 숭숭 뚫린 헤진 걸레 같았다. 그때 나는 직관적으로 알았다.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살았던 부분만 남았음을. 이 삶을 마친 후 하느님이라 불리는 존재 자체 앞에 서게 될 때 심판은 하느님이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존재양식자체가 하게 될 것이다. 삶이 온전히 거짓이었다면 하느님 앞에 존재자체가 없는 무가 될 것이다. 심판받을 건더기도 없는 셈이다. 후일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그 앞에 서게 되었던 그 빛이 ‘창조되지 않은 빛’ 임을 알게 되었다.
주님, 주님 되뇌는 개인도 공동체도 오늘 복음처럼 이 존재와의 유대, 현존감없이 자기들끼리 행복하려 한다. 결과는 풍랑이고 정작 주님은 유령취급을 받는다.
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