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강론을 준비하면서 할 말이 많은걸 보니 아직 숙성이 안된걸 알겠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을 기억하다.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만큼 멀리 갈 때는 없다” 오늘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니 멀리 갈 것 같다.
몇 일간 돈암동 수도원에 머물면서 틈틈이 문화재를 찾다. 낙산에서 혜화문으로 이어진 성은 옛 보성고등학교 뒤에서 다시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옛 성곽을 따라 걷기도 하고 성 밖 북쪽, 그러니까 유난히 문인과 예술인들의 자취가 많은 성북동도 갔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혜곡 최순우 선생 옛집이다. 평생 한국의 미를 찾아 발굴하고 보존하며 알리고 즐기셨던 분이 마지막까지 사셨던 장소다운 곳이다. 고대광실이 아닌 아주 작은 한옥의 앞뒤마당, 요기조기에 놓인 동자석상과 돌 탁자, 절구등 친근감이 드는 생활소품이자 예술품들. 서재격인 작은 방위의 현판에는 “杜門卽是深山” (문만 닫으면 바로 깊은 산) 라는 휘호를 스스로 쓰시고 다른 방위에는 “梅心舍” (매화와 같은 마음의 집-선비가 머무는 곳)를 걸었다. 혜곡선생의 처소에 비하면 만해 한용운의 처소였던 尋牛莊은 몰취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삭막한 느낌이다. 아마 선사의 처소라서 선방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걸까?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이 자신의 수필집 “무서록”에 집을 짓게 된 배경과 과정, 집터의 내력을 기록한 곳이다. 마침 보수중이라 다음 기회에 보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며 자연 45년 세계대전 이후 세상을 휩쓰는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생각하다. 팝, 청바지, 코크, 햄버거 등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는 반미데모를 할지라도 청바지입고 코카콜라 마시며 해야 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 지구상 누구도 이런 문화의 세례를 피해갈 수 없다. 예수와 그 제자들의 시대에 유럽은 지금의 아메리카나이제이션과 그 영향력 면에서 동일한 헬레니즘의 세례를 받았다. 해외여행 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성지순례가 한창인데, 처음엔 이스라엘에 국한되더니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는지 점차 로마, 그리스, 터어키등 헬레니즘 판도로 영역이 확대되는 추세다. 사도 바오로는 무슨 용기로 헬레니즘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것도 그 중심지 아테네, 아레오파고에서 당시로서는 변방에 지나지 않는 낯선 곳에서 살다가 사형을 당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꺼낼 수 있었을까? 그 자신이 타르수스 출신으로 로마시민권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헬레니즘에 정통할뿐더러, 가믈리엘 아래서 자기유산을 깊이 있게 배웠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은 그 안에서 시작되고, 이 둘의 만남으로 새로운 비전과 창조적인 비천(飛天) 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대학생때 길을 찾는 중에 청량리 어느 곳에 있던 수도회를 물어물어 방문한 적이 있다. 막노동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 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때 든 생각은 “나는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였다. 그런데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어 물었더니, 프랑스 파리로 수련을 받으러 간다고 한다. 웃기는 짬뽕 같은 이야기지만 “청빈하기 위해서 돈이 참 많이 든다” 자신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자긍심이 없이 제 1세계로 그리스도교를 배우러 간다는 것은 “청빈하기 위해 돈이 많이 드는 생활양식”을 배우고 문화식민지가 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승천축일! 봉덕사 신종, 속칭 에밀레종은 한 아이를 제물로 하여 소리가 온전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 종에는 飛天像이 부조되어 있다. 승천, 비천은 그 문화와 역사 속에 선교사보다 먼저 이미 와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내고 드러낼 때 시너지로서 나타나는 동력과 비전일수도 있다. 성지순례에 유익한 점이 하나 있다면, 자기 집 마당이 聖地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 한다. 去者必反이라 했으니 이제는 돌아갈 때다, 집으로! |
박태원 가브리엘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