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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위대한 사랑

2019.05.19 17:11

mulgogi 조회 수:89

                                                                              조 아녜스 (광주) 

        

10여년 전 아버지 요셉이 광주에 있는 성 요한병원 호스피스를 이용한 기억 때문에

나도 성 가롤로병원에서 하는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을 받고

주 1회 4시간을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에 시작했으니 봉사자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햇병아리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기억이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은 환우들과 그 가족들이

서로 간의 정을 나누며 아름답게 이별하기 위한 곳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기는 애처로운 삶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봉사하기 전에

오늘도 나의 눈빛과 말과 손끝에 주님이 함께해 주시길 청하며

분홍색 가운을 입습니다.

지난 주에 활기차게 이야기하시던 분이

일주일 사이에 하늘나라 여행길에 오르셔서 침대가 비어있기도 하고

아직은 팔팔한 이삼십 대가 임종을 위해 들어오기도 합니다.

 

침대에서 팔다리를 움직이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지키며 앉아 계신 할머니는

아이처럼 몸집이 아주 작았습니다.

“할머니, 잘 계셨어요?”

우리가 반가우셨던지 할머니는 쉬지 않고 당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 )노름에 기집 질에 드라마에 나오는 것보다 현실은 더해요.

그 더러운 세상 인자 와서 사랑한단 말 한마디 들을라고 살았던가.

죽을 날 받아 놓더니 사랑한다고 말합디다.

허허허... 그런들 저런들 어쩔 것이요.

우리 영감이 잘생기지 않았소? 키가 187이여.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5년에 한번 씩 나타나서 새끼만 배놓고 나가블고.

잊어블만 하면 집에 옵디다.

우리 애들이 5년 터울인디 얼마 전 큰딸이 하늘나라로 갔소.

시어머니 시아버지 병수발에 딸가정 병수발 했으니

내가 웬만한 간호사보다 더 잘할 것이요.

우리 영감 기저귀도 내가 더 잘 가요.

이 양반이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링겔줄을 오드득오득득 씹어븐단 말이요.

그래서 할 수 없응께 주사바늘을 발에다 놨다요.

입으로 못가져가게.

그나저나 우리 딸이 이 꼬라지를 다 내려다 보고 있을거신디

지그 아부지가 오면 반가할랑가나 모르것소...”

 

가슴에 쌓인 한을 풀 듯 폭포수처럼 ‘괄괄괄’ 쏟아내는 할머니의 말씀을

할아버지가 듣고 계신다면 조금은 민망할 것 같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병실도 돌아봐야 하지만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이야기를 이제야 말할 수 있는

할머니의 한탄을 들어드리는 게 그 순간 사랑임을 느꼈습니다.

살면서 울고 싶고, 말하고 싶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야기하는 중에도 할아버지를 살피시느라

두 눈과 두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시던 할머니.

몸부림치던 할아버지는 숨을 고르게 쉬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제야 우리도 할아버지가 주무실 때

할머니도 좀 쉬시라고 권해드리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후 하늘여행을 떠나셨지만

보호자로 계시던 몸집이 작은할머니 생각이 가끔 납니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가장을 기다리며 자식들을 키우며 시집살이를 해오신 할머니.

얼마 전엔 귀한 딸마저 암으로 떠나보내셨는데 할아버지마저 보낸 할머니.

고단하게 평생을 살아오신 할머니는

어떤 힘으로 그 모든 시간을 받아들이고 버티고 견디며 살 수 있었을까요?

혼자 자식을 키우고,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돌아온 탕자 같은 할아버지의 마지막까지 지켜내신 할머니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이고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도 가족'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이신 예수님이 함께하고 계시기에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열 달을 품어 세상에 내놓은 자식이라도

말 안 듣고 말대꾸하면 속상하고 미운 마음이 드는 게 인간입니다.

누구나 할머니처럼 사랑하기가 쉽진 않기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수없이 ‘사랑’을 강조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도 사랑의 졸병이 되어 주님 앞을 맴돕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 희망을 두고요.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과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넘어지되, 즉시 일어나 달려갈 아버지가 있는 저는

오늘도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