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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20:41

내 마음의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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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바오로 (광주)

 

퇴직 후에 할 일을 알아보러 후배와 1년 6개월여를

휴일에는 준 산간지역을 샅샅이 돌아다닐 때가 있었다.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물도 맑고 개발이 되지 않아 오지 같은 느낌이 나는 곳도 있었다.

광주에서 약 한 시간의 거리지만 상대적으로 땅값이 싸고 경관도 괜찮아서

기본 수익구조만 있으면 귀농·귀촌 지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내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후배와 의기투합하여 주말마다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나 자수성가한 후배의 집요한 성격과 이해관계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에 실망하였다.

그리고 땅 구입도 어렵지만 가치를 높이는 수익구조를 만든다는 게

여간해서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청정 밭미나리와 신품종 자작묘목까지 깊이 알아보았으나

50대 후반의 나이에 여러 여건을 돌파하기에는 늦겠다고 판단했다.

지역 상생까지 생각하고 지역유지와 주민들을 만났다.

비용이 들어가도 별 진전이 없었고 후배와

많은 이야기를 하며 방법을 강구하던 일들이 추억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 지역에 신자가 거의 없는 공소가 있었다.

정보를 얻으려고 공소를 찾았는데 회장님이 살고 계셨다.

부모님이 황해도에서 피난 와서 정착하며 공소를 세우셨다고 한다.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집안인데 부모님이 1960년대부터 하셨던 농촌 어린이집도

70대 초반인 회장님이 은퇴 후에 어렵게 이어가고 있었다.

가끔 들러서 차도 마시며 신앙생활과 지역사정을 듣곤 하였다.

 

혼자 우연히 들렀던 날에는 공소 마당에서

자전거 하이킹 복장에 수염을 기른 사람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느끼며 회장님을 만났는데 마침 잘 왔다고 한다.

마당에 계신 수사님과 함께 주님수난 성지주일 공소 전례를 하자는 것이다.

수사님이 안식년에 전국 공소 순례를 하는데 여기에 때맞게 오셨단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바로 주님수난 성지주일 공소 전례를 시작하였다.

낙후지역이라 할머니 두 분을 포함하여

예수님, 군중, 해설자 역할을 함께 하며 다섯 명이 공소 전례를 드렸다.

 

처음으로 공소 전례 체험을 마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떠나야 텐트를 칠 수 있다며

자전거에 조그만 트레일러를 달고 기어이 출발하셨다.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하도 특이하여 뒤쫓아 가기로 하였다.

자전거로 고갯길을 넘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벌교 성당까지 가니 성당 안에서 기도하고 계신다고 한다.

 

성당 벤치에서 다시 만나 사연을 듣고 싶어 뒤따라왔다고 하자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산골 공소에서 자주 놀았는데 안식년을 맞이하여

전국 공소를 자전거로 돌아보기로 하셨단다.

수도회에서 정신병원 사목을 하였는데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고 하셨다.

별로 말이 없고 심신이 피곤해 보였는데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혼자서 치유의 시간을 갖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2월부터 시작하여 5월까지 공소 순례를 마치고 캐나다로 가신다고 한다.

그러고는 저녁 식사 제안도 거절하고 서둘러 떠나버리셨다.

 

특이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본 가톨릭 경향잡지에 수사님이 공소 탐방기를 연재하고 있었다.

수사님이 제주도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서 가족여행 때 잠깐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정원에서 오래된 나무에 물을 주고 계셨는데

수염은 깔끔하게 깎았고 해맑게 웃는 미소가 좋았다.

공소 탐방기에는 아담하고 소박한 공소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노령화되고 어려워진 농촌 현실과 같이

공소도 신자 수가 줄어들었지만 정겨운 모습과 글들이 있었다.

우연히 수사님의 공소 탐방과 순례기를 접하고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더구나 홀로 석달 정도를 고행하며 순례하는 장면을 목격한 나에겐 큰 울림이 있었다.

 

나도 화려하고 분주한 도시를 벗어나 생활환경이 많이 바뀌며

평범하지 않은 귀농을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전원생활을 꿈꾸며 불편함이 더 많을 농촌생활은 잊곤 하였다.

여행하듯이 바람 쐬러 돌아다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농촌에 정착하기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수기들을 읽었던 터라

순례자 같은 고행까지 각오하지 않고서는 농촌의 어려운 현실과 차이 나는

정서를 극복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는 마음에 드는 땅을 비싸게 사지 않으려고

외지인으로서 주민접촉 방법들을 우선 생각했다.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지, 주민들과 열린 마음으로 상부상조할 수 있겠는지는 뒷전이었다.

순서가 바뀐 셈이었다.

공소를 다니면서도 사심이 앞섰던 것 같았다.

 

이후로 차츰 신앙인으로서 내가 할 역할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노동력 때문에 인기 있는 수종의 묘목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었다.

묘목으로 수익구조가 궤도에 오르면 부동산 가치도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후배와 갈등으로 한순간에 깨지면서 동업의 한계를 깨달았다.

농촌에서 새로운 개척이 어려움을 알면서도 가능성을 찾아

열심히 알아보았던 시간들이 아깝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공소 회장님과 순례길에서 만난 수사님,

오염되지 않은 마을과 산으로 다녔던 일들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그 시절 추억이 그냥 헛된 것은 아닌 게 하나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쪽의 아름드리 소나무 그늘에 앉아

그림 같은 산 능선을 보고 와서 산골 생활을 상상하는 시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막연했던  산과 술길처럼 농촌에서 살길을 찾았던

그 시간들이 내 마음속 순례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제는 도시에서 길을 잊지 않도록 주님과 동행하며 지혜의 길을 걸으려 한다.

 

 

산의 고요함이 나를 부른다

 

삶의 고단함을 품어주며

놓고 가라 하나보다

 

쏟아지는 햇살

때론 일렁이는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숲들과 속삭이다

산에 향기

산의 노래

한가슴 안고 내려와

 

숨어드는 달빛과 함께

이제 또 산중의 적막속에

아롱거리는 하늘의 별을 딴다

 

그리고 가득해진 산의 품속에서

아련한 모태의 향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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