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19.06.16 08:18

삼위일체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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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모퉁이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힘,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우리를 지켜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체험해 왔습니다. 하느님은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매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 신앙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특별히 하느님은 인간의 시공간의 역사 안으로 개입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긴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게 하고 가르치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교회 안에 현존하시고 내주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후에 이어지는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령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게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밝혀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을 막연한 신비로 알아듣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방식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야 하듯이 사랑을 배우려면 사랑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은 체험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의 <명상의 씨> 한 부분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하느님의 본질인 성소, 사랑이 감추인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임의 거룩함에 들어가려면 임이 거룩하심과 같이 나도 거룩해야 하며, 임이 완전하심과 같이 나도 완전해야 한다. 이는 내가 아무리 애쓰고, 나와 싸우고 남과 다툰다 할지라도 하나도 이룰 수 없다. 사랑이 없는 나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이 나를 임과 같게 만들어 주셔야 한다. 임이 임이신 임의 사랑을 내게 주시고, 내안에서 사랑하시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같이 하시면 나는 틀림없이 임이신 사랑이 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임안에 나를 잊어버림으로써 참 나를 가질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랑하는 존재와 하나가 됩니다. <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고 고백한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사랑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 그것이 곧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한다면, 러시아의 대문호 토스토 에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거룩함이고, 거룩함의 절정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코 혼자서 하는 독립적인 행동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 <삼위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관계가 곧 사랑의 진정성을 말합니다. 이 관계 안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관계가 아름다울 때, 세상이 구원될 수 있는 것이라고 토스토 에프스키는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완성은 관계의 일치에 있는 것입니다. 관계의 일치, 친교의 관계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구원의 원천이시며 사랑의 모태이십니다. 당신들 안의 이 놀라운 사랑의 친교와 사랑의 완성 안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세상을 향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가 곧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 잠언서는 지혜이신 성자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며 천지창조에 함께 참여하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고 잠언은 얘기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는 행위가 아무 것도 없는 무 가운데서 하느님 홀로 이루시는 매우 고독한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닮은 아이를 갖기 원하여 둘을 모두 닮는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기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나의 아이를 갖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너의 아이인 나의 아이는 이제 너에 대한 사랑이요 동시에 너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너와 나의 곧 우리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창조는 사랑이며 사랑의 넘침이며 폭발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결코 혼자 창조하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이신 성령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창조의 완성인 구원사업도 이루십니다.

 

살아가다보면 아무런 기쁨도 희망도 없고 이러한 삶 가운데는 하느님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낳아만 놓고 돌보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 또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 고통과 싸우고 있다고 느껴질 그 때, 나 혼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곧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지만 사실은 내가 그 주님을 도외시하고 나 혼자 그 고통과 싸우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로 사도가 사도행전에서 얘기하듯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평소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치 숨이 막힐 때에야 공기의 존재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공기가 없는 듯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어느 구루가 얘기하듯 우리는 물속에 있으면서 목마르기도 하는데, 이는 물이 있는데도 물이 없는 줄 알고 입을 꽉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숨 쉬는 공기, 늘 만나는 햇살, 언제나 서 있는 나무,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표지인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숨 쉬는 순간 들이키는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랑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들은 로마서는 우리가 받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고통 속에서도 인내와 끈기와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게 되었다고 얘기합니다.(5,3~5참조) 그러기에 대부분의 우리 고통은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을 숨 쉬지 않은 고통이었고, 하느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지 않으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지 않은 고통이었고, 하느님께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을 뿌리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들이요, 바로 하느님의 성삼위적인 현존임을 깨달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사랑으로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복녀 성삼의 엘리사벳의 노래를 보냅니다. <흠숭하는 나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제가 제 자신을 온전히 잊도록 도와주십시오.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머무는 것처럼 당신 안에 자리하도록 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제가 느끼는 평화를 깨트리거나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않게 해 주소서. 매순간 당신 신비의 심연에 보다 더 깊이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제 영혼을 평화롭게 하시어 당신의 하늘이, 당신이 사랑하는 거주지가, 그리고 당신이 쉬시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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