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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안드레아 (서울)

 

지난해 긴 여름의 끝을 잡고 가을의 길목에 들어선 9월 어느 날. 양양 38선 기슭의 오상영성원을 찾았다. 영원한 동반자 모니카와 함께 2박3일 일정의 대침묵 피정을 위해서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는, 고요한 소나무 숲 속의 영성원은 단아하고 아담한 모습으로 정겹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야말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 안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에 안성맞춤의 ‘외딴 방’이었다. 내 영혼의 안식처가 따로 없었다. 내 안의 고독이 사랑과 악수하고 평화와 인사하며 감사를 선물하는 첫날이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 잠잠하던 새와 바람을 깨우고 피정 둘째 날의 동창이 밝았다. 성무일도를 바치고 아침을 열고 산책에 나섰다가 우연히 디모테오(티모테오) 순례길을 발견했다. 디모테오 순례길은 예전엔 전혀 몰랐던 금시초문의 38선 숨길과 맞닿아 있었다. 이 순례길은 양양성당에서 오상영성원을 거쳐 명지리까지 총 20km에 이르는 임도로 이광재 신부님이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성작자와 수도자들을 목숨을 걸고 인도한 성스러운 피난길이라는 사실을 피정 후 인터넷을 찾아보고 알았다. 춘천교구에서는 매년 10월 9일 착한 목자의 표상이 되신 디모테오 신부님의 삶을 묵상하고 기리기 위해 신자들과 함께 순례길 보도행사를 갖는다는 전언이다.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는 매일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진정한 나를 찾고 신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는 걸 책에서 보았다.. 800킬로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걱정과 생각을 내려놓고 호흡만을 느끼며 온전히 걸음에 집중하는 때가 찾아온단다. 어느 순간 주위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고, 내 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공명상태에 이른다는 게 순례자의 경험이다. 바로 그것이다. 감히 산티아고에 비할 수는 없지만 디모테오 순례길도 새로운 자아를 찾고 무심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여긴 순례길이로되 어딘지 모를 따분함, 평안함, 생경함이 함께 어우러져 묘한 하모니를 이루는 게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징이다.

 

울창한 송림의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내 안의 내가 누구인지 근본적인 물음에 천착하고 주님이 주신 남은 삶을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그런 순례길이라면 어딘들 어떠랴. 지리적으로는 38선 숲길을 따라 걷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삶을 성찰하고 참회하는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참나’를 찾아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처음에는 조금 걷다가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무릎관절이 안 좋아 무리를 해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정형외과에 가봐도 별 차도가 없어서 이러다 다리를 못 쓰는 거 아니냐 하는 걱정이 태산 같았던 시기였다. 산림도로를 따라 만든 순례길을 조금 걷다 보니 저만치서 다가오는 어떤 피정자를 보고 동반자가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순례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 시작과 끝을 전혀 알 수 없기에 돌아갈 것(return)이냐 계속 갈 것(go)이냐의 갈림길에서 잠시나마 망설임과 호기심이 교차한다. 그냥 돌아가자니 아쉬움이 남고 그렇다고 더 나아가자니 무릎에 자신이 없고 거기에 동반자가 독촉하는 이런 상황에서 십중팔구는 선택의 여지 없이 회귀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몸(나)은 리턴을, 마음(내 안의 나)은 고를 외친다. 그래서 동반자의 마지못한 동의아래 마음 가는 대로 고를 선택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냥 돌아갈 걸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갈피를 못잡아 마음은 갈대밭으로 변했다. 무모한 결정이라는 동반자의 핀잔에 뒤통수가 땅겼다. 어차피 선택한 길이니 묵주기도나 바치고 가자며 그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런데 가도 가도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시작한 아침 산책이 2시간을 넘기고 3시간에 가까워지자 불안이 엄습해 왔다. 너무 멀리 와버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자책과 후회가 밀려오는데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아픈 무릎도 마취제를 맞은 양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12시 반까지는 복귀해야 했다. 보폭을 넓히고 걸음 횟수를 늘려 조금 속력을 냈다. 바로 그때 자동차 경적 소리가 나면서 신작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막상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에 당도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감각을 상실해 더욱 막막했다. 동반자도 더 이상은 못 걷겠다고 손 사례를 쳤다. 가벼운 산책길이 장장 3시간이 넘는 고행길이 되고 말았다.

 

그 덕에 하느님과는 기도로써 원 없이 만났다.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과 순례자’에서 기도의 매력은 우리를 동경으로 채운다고 했다. 쉽지 않은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하늘의 선물이 바로 기도라는 설명이다. 내 안의 나는 이번 순례에서 새로운 변화를 불러오는 즉 삶의 특별한 의미를 담은 카이로스(kairos)를 경험했다. 세상의 십자가가 그저 고통으로만이 아닌 신비로 다가온다는 걸 이번 순례를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주님의 은총은 어디서나 항상 마실 수 있는 공기와 같이 대가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다고들 하나 ‘고통 없는 은총은 은총이 아니다(no pain, no grace)’는 명제와 ‘의심 없이는 믿음도 없다(no doubt, no faith)’는 신앙의 원리를 어렵사리 실증할 수 있었다.

 

어쨌든 디모테오 순례길은 나에겐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아주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 좌정하지 못할 정도로 시큰거리고 아픈 무릎관절이 순례길을 걷고 씻은듯이 나았다. 영화 ‘극한직업’의 명대사를 차용해 패러디 하면 이쯤 되겠다. “지금까지 이런 신기는 없었다. 이것은 기적인가, 자연치유인가?” 나도 아직까지 그걸 잘 모르지만 분명한 건 그 이후 지금까지 무릎이 멀쩡하다는 사실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게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자연을 포함해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법은 자연법칙을 초월한다. 하늘나라에서는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새로운 문이다. 죽음을 새로운 시작 즉 부활로 바꾸어 처음으로 그 문을 열고 나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끝이 새로운 시작에 맞닿아 있는 삶이 바로 엄청난 구원의 신비이다.

 

디모테오 순례길은 나(거짓 자아)를 버리고 내 안의 나(참 자아)를 발견하는 ‘삶의 새 좌표’를’ 제시해주었다. 이번 순례길은 단순히 세속적인 변화가 아니라 살아야 하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되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기댈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을 이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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