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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9:55

산타페, 나의 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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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루갈다 (서울)

 

“눈으로 보면 관광이고 마음으로 보면 순례입니다.” 단풍 좋던 가을, 연풍성지 순례 미사에 신부님 말씀이다. 그 마음이란 게 꼭 통해야만, 느껴야만 좋은 건가?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 했다. 그 빈도에선 ‘사람’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만 꼭 생명체가 아니어도 눈이, 마음이 가닿는 곳곳에 흩뿌려 놓으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여정에는 숱한 사람과 사물이 더불어 살아간다. AI와 교감하면서 행복감도 충전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80년대 중반에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전격 Z 작전’에 인공지능 자동차 ‘키트’가 등장한다. 키트는 주인공 마이클의 필요사항을 입안의 혀처럼 움직여 해결하는 모습은 마치 일급 수행비서, 007, 명탐정 코난을 조합한 인물 같았다. 그 드라마를 보며 환호했던 꿈들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자동차는 자율주행차로 시작을 알리며 AI로 하나씩 근접해 가고 있다. 그런 최첨단 차가 아니어도 내가 먼저 말을 건네며 ‘키트’로 마주하는 차가 있다. 각종 반려동물을 키우며 교감하는 그 마음을 나는 오랜 시간 함께 한 자동차에 느낀다.

 

둘째까지 낳고도 우리는 삼천리호 자전거 한 대에 가족 넷이 올라타고 겁 없이 달렸다. 아빠는 안장에 앉아서 페달을 밟고, 큰아이는 앞바퀴 위에 간이 의자를 붙여서 앉히고, 뒷바퀴 위 짐을 놓도록 마련된 자리엔 내가 한 손으로 둘째를 감싸 안고, 한 손으론 아빠 허리를 휘감아 평형을 유지하며 앉았다. 도합 150킬로 너끈한 무게였다. 바짝 내려앉은 바퀴는 도로의 작은 요철에도 덜커덕 쿵 거렸고, 그 반응은 곧바로 엉덩이에 충격으로 전달되어 ‘아이쿠야’하며 조심을 외치지만, 아이들에겐 아빠가 재미를 위해 마련한 마술쯤으로 생각하는지 까르륵 웃음이 터지고 그 소리에 또 다함께 웃음꽃은 피어올랐다. 어디 중국 영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이다. 그러고도 사방팔방 잘도 돌아다녔다.

 

IMF가 터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퇴직금이 정산됐다. 자동차는 없었어도 사내아이들의 유난스러운 장난감 자동차 사랑으로, 운행되는 네 바퀴 차량을 거의 꿰고 있던 터에, 때맞춰 출시된 현대자동차 에스유브이 차량의 터프함에 매료되었다. 마치 ‘널 위해 준비했어’하는 광고 카피의 재현 같았다. 무슨 배포에 퇴직금을 고스란히 자동차회사로 순간이동 시켰고,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근육질 몸매를 연상케 하는 외관을 자랑하며 은빛 싼타페가 우리에게로 왔다.

 

인생 첫차 싼타페. 자동차 이름은 세계 곳곳 지명을 사용한다는데 싼타페 역시 미국 도시 이름이라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은 ‘성스러운 믿음’이다. 어쩌면 딱 내 마음이다. 살금살금 기어가던 초보운전 시절, 대로를 간신히 벗어나 후미진 뒷길을 들어섰는데 경찰의 음주운전 불시검문이다. 문을 열라는 손짓과 함께 쑥 들이미는 네모진 무언가, 이미 영혼은 떠났지만 몸은 당차게 반응했다. 짧은 외마디. 아!!!... 놀란 젊은 경찰이 다시 무전기인지 마이크인지 쑥 내밀고, 목소리가 약했나... 다시 짧게 악!!!!!... “아줌마 노래방에서 오는 길이예요?” 절레절레 “아닌데요” “소리 지르지 말고 후~우 불라구요”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오고 민망함에, 더욱, 착하게, 절레절레 “저 술 안 마셨는데요” .

 

그리 정을 쌓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17년 차. 삼십칠만여 킬로. 이제 나의 키트 싼타페도 쌕쌕거리며 힘겨워한다. 일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구석구석 달리며 동고동락했다. 사랑이 깊으면 질책이 없다던가. 그저 장하고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다. 이젠 내가 말을 걸고 쓰다듬고 시동을 건다. 신림 고갯길을 오를 때면 노구처럼 헐떡이는 거 같아서 안쓰럽다. 얼른 내려 업고 가고픈 마음이 앞선다. 싼타페에 AI가 장착되어 내게 말을 건네고, 로봇 날개를 달아서 험한 길, 고갯길엔 산뜻하게 날아서 가벼이 움직이게 하고 싶다. 이쯤이면 병적이다. 뭐. 그래서. 뭐. 어떤가, 내 삶의 여정에 빼놓을 수 없는 지고한 내 사랑인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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