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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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로 성인들의 안내

고통 받는 것을 배우기

성인에게 고통은 여전히 고통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고통이 그의 사명에 장애물이 되거나,
행복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행복과 사명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결정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


행복의 추구를 고통과 연결시켜 말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인다. <고통이 없다면 얻어지는 것도 없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단식이나 운동에 해당하는 말이다. 진짜 고통은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확실히 행복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것과 가능한 멀리 떨어질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통을 <통과> 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도 고통은 늘  상 똑같이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일, 사랑, 내적인 평화를 통하여, 혹은 모든 일상의 걱정에서 이탈할 때에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추구는 어쨌건 어떤 만족을 준다. 그러나 단지 만족할 때에만 행복할 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중언부언에 불과하다. 만족이란 어떤 거절, 불똥, 얼음 한 조각, 부서진 막대기 하나 때문에도 쉽게 사라질 만큼 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성인들의 안내가 필요하다. 그들은 고통이 더 이상 절대적인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행복의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고통을 겪을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 그들은 고통의 의미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이 결코 파괴시킬 수 없는 어떤 의미나 진리가 삶의 심장부에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살았다. 그들은 고통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하느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죽음이나 생명도....어떤 높이나 깊이도 참으로 우리가 그것을 원한다면, 결코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느님이 버리는> 자리는 아무 곳에도 없으며, 모든 상황 속에서, 심지어 가장 무자비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사랑으로 충만한 생명으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열려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복음의 가장 심오한 신비라 생각했다.


수레바퀴의 축

어떤 성인들은 고통에 관한 완벽한 논문들을 썼다. 첫 번째로 쓴 사람은 보에티우스(480-524)성인으로 <철학의 위안>을 썼다. 불행을 직접 경험하면서 쓴 이 책은 고통과 행복의 관계를 명료하게 다룬다. 보에티우스는 명망이 놓은 그리스도인으로 로마 왕실의 고위층관리였다. 궁정의 음모에 휘말려서 반역죄와 철학에 대한 불경한 연구의 죄목으로 명예가 박탈되고, 구금, 고문 받고 이후에 결국 처형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의인화한 후견인, 철학부인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섰다. 철학부인은 고통 중에 있는 그의 제자를 위호하면서 보에티우스에게 세상의 걱정에서 이탈하고 오직 최고의 선, 하느님, 모든 것의 창조주께 몰두하라고 촉구한다. 그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그의 평화와 평온함은 더 이상 바깥의 상황에 따라 좌우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보에티우스의 지금도 이어지는 유산중의 하나는 삶을 천천히 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로 묘사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지상에서 재물, 권력, 명성들을 즐기는 사람들은 <떠오르는> 지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지나가버리는 것들로부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바퀴의 표면에만 매달리는 한,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우리의 번영과 만족은 걱정과 주의 때문에 그늘진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찾으려고 이웃과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해야 한다. 인간행복의 즐거움은 한 순간에 그치며, 회한과 분리될 수 없다. 아무리 즐겁다 해도 행복은 떠나려고 결심하면 가차 없이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부인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행복하고자 한다면, 수레바퀴의 바깥으로 향하지 벗어나지 말아야 야 한다고 한다. 즉 행복이 지나가 버리는 재화에 있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수레바퀴의 중심을 향해 가야한다. 그렇게 할 경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거룩함의 추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거룩함을 무엇이라 생각했는지? 단지 스토아 철학에서 주장하는 체념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한지? 대답은 수레바퀴의 축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에 달려있다. 그 주제에 대해 철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없다.

 

중세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고통에 대해 더 실제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14세기 초에 씌어진 <거룩한 위안> 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에크하르트는 30여 가지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떤 주장은 소수의 신비가들 만이 따를 수 있는 제안이다.;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하느님과 그 분의 뜻에 취한 나머지 그의 온 행복은 자아와 자아에 관한 관심에 전혀 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진리만 알고자 한다.>  또 다른 주장은 좀 더 지상에 가까이 내려 앉아 <어떤 상실도 완전한 상실이 아니다.>라는 격언에 관한 성찰로 표현한다. 잃어버린 것보다 갖고 있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편안해지려면, 자기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 대신 더 못사는 사람들을 행각해보라는 주장을 펼친다. <받은 축복을 헤아려 보고>,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가! 또 때로는 철학 부인이 보에티우스에게 주었던 충고를 상기시키는 주장도 한다. 즉 우리의 고통은 <사물의 바깥에 살고 있거나 비우지 않거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피조물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는 확실히 지혜가 있다. 고통에서 이탈할 때, 다른 이들의 불행과 우리의 고통을 비교하거나, 받은 축복들과 그 무게를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아마도 보다 넓은 전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가서 철학적 논쟁을 통하여 적절한 위안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짐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다가오는 한 친구의 친절한 행위와 이 모든 철학적 논쟁들을 기꺼이 바꿀 것이다. 고통을 체험하면서 우리들은 무심한 온 우주가 우리와 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가장 확고부동한 무신론자들조차 그들이 혼자가 아니며, 누군가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은밀한 슬픔을 이해하고, 연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는다. <연민>이란 <함께 고통 받는다.>는 뜻이다. 에크하르트도 고통을 축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연민을 축복한 것이라 해석했다. 결국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옆에 무심하게 물러나 않아서 세상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그 분을 십자가로 이끌었다. 그 십자가는 모든 고통이 집중된 자리였다. 십자가가 돌아가는 세계의 움직이지 않는 축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무심한 귀에 떨어지지 않고, 실제의 심장부에서 자비와 연민의 원리와 만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크하르트는 우리를 철학의 위안 너머로 데려간다. 그는 <우리가 고통 받을 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고통 받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미 아는 것처럼, 고통이 친구의 공감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연민 속에서 내가 받는 위로는 얼마나 클 것인가!>라고 설명한다.

 

성인들의 삶

모든 성인이 다 고통에 관한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고통을 하나도 겪지 않고 성인이 된 사람은 없다. 박해, 질병, 굶주림, 친구와 가족의 죽음, 위대한 일과 개인적 꿈의 실패, 결실 없는 노동에 의한 소진, 외로움, 영적 고통 등. 성인들의 삶은 고통의 연대기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고통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값이었다. 또 다른 경우에 고통은 신앙이 단련되고, 시험을 받는 도가니와 같았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은 그들의 회심과 소명의 식별 때 고통을 겪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보면 중요한 전환점에서 고통이 보이고 그 고통은 성인에게 새로운 <관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해준다. 많은 다른 성인들의 삶도 이와 비슷한 체험들이 일어났음을 본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무기력이 끼치는 영향을 감지하고, 새로운 목표에 필요한 에너지를 발산 시키는 고통과 불행의 역할을 깨닫는다. 어떤 경우에 그 고통은 질병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상실로, 혹은 어떤 야망의 부서짐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고통을 겪으면서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더 깊은 대답들을 찾기 위하여 나아간다.

 

영적인 안내자

고통이 삶의 황량함과 헛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 결과는 마땅히 절망일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의 삶에서 고통은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고통은 성인들이 갖고 있던 착각과 망상을 벗겨줄 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고, 은총의 현존을 더 빨리 느끼도록 예민하게 만든다. 이렇게 될 경우 고통은 자비로운 친구가 되고, 심오한 영적인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이 역설적인 진리를 깨달으면서 어떤 성인들은 십자가의 고통에 자신들을 내던질 수 있는 경험을 갈구하기도 했다. 그들의 목적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영감, 연민, 깊은 헌신등 극한적인 상황이 가져올 수 있는 경험들을 원했던 것이다.

 

노르위치의 줄리안(1342-1416)의 이야기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영국의 은둔자이며, 신비가로서 저서인 <거룩한 사랑의 계시>에서 젊었을 때 죽음과 같은 위중한 병에 걸려보기를 기도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실감 있게 느껴보고 깨닫기 위해서였다. 또한 회심, 연민, 하느님에 대한 갈망에서 오는 <세 가지 상처들: 성흔>을 받고자 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줄리안의 기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보인다. 그런데 줄리안이 흑사병 대란에서 살아남은 사실을 기억해 보자. 그는 고통이 말 그대로 실제이고, 만연되어 있던 때에 살았다. 줄리안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겪었고, 그래서 고통의 본질과 그 의미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개인적 경험 안에서 발견했다. 그의 말대로 <질병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정화되고, 그 후에 그 질병 때문에 더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 이었다. 줄리안은 고통을 체험하고자 하는 그의 간구가 서른 살 때에 응답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때 그는 신비스럽고 파괴적인 질병을 앓았다. 나흘 밤낮으로 그는 마비상태에 있었고, 견딜 수 없게 고통을 겪었다. 마침내 사제가 병자 성사를 주기 위하여 왔고, 줄리안의 얼어붙은 시선 앞에 십자가를 들었다. 그때 갑자기 모든 고통과 비탄이 그를 떠나갔다. 그 순간에 줄리안의 표현을 보면, 그는 <살을 입은 예수님, 고통 중에 있는 살을 입은 예수님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줄리안에게 말했고, 다른 신비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체적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의 손안에 호두처럼 잠겨있는 세계를 보았고, 확신이 자리 잡았다. 결국 우리의 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며, 모든 것이 좋을 것이고, 모든 사물의 모습이 좋을 것>이라는 잊을 수 없는 환시를 본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쥴리안의 환시는 병리학적으로도 생생하다. <나는 왕관 밑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뜨겁고 마음대로 풍부하게 흐르며, 살아있는 시내였다. 떨어지는 커다란 핏방울.... 마치 청어의 비늘처럼“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을 지켜보면서 그의 관상은 사랑의 깊이에 모아졌다.> 왜,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그 분이 고통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줄리안에게는 이 모든 사실이 위한과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에 <갑자기 그분은 기쁨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분이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그분의 본질적인 선함 때문에, 우리를 그분과 함께 그분의 기쁨의 상속자로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사랑의 계시>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통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만족하는가? ...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하여 수난 받는 것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며, 끝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 고통 받을 수 있다면, 분명코 나는 더 고통 받을 것이다.> 모든 예상이 빗나가며 쥴리안이 죽지 않고 완쾌되었을 때, 그는 받은 계시를 모두 라틴어가 아니라 중세영어로 썼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노르위치의 교회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지금가지 그의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먼저 극한의 고통을 겪었으나 패배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더욱 강해지고 에너지를 충만하게 받은 삶의 지혜를 절실하게 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며 살았다.

 

14세기의 줄리안이 가졌던 비전들은 오늘날 우리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쥴리안의 신비적인 관점은 교회의 전통적인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류의 모든 죄의 빚을 대신 <갚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빚을 대신 갚았다는 말에 대해 위안을 받지 못하며, 편안하지도 않다. 그러나 쥴리안에게 예수의 고통이 지닌 깊은 의미는 <하느님의 연민이 얼마나 깊은가를 그리고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이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에서 위로를 얻을지 모르지만, 쥴리안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했다. 줄리안은 고통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우리 모두가 < 영혼과 육체로서 하느님의 선함으로 옷을 입고, 그것에 둘러싸인 존재>라는 거룩한 진리를 통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쥴리안이 스스로 고통을 겪으면서 터득한 영감이며, 절망이나 금욕적인 체념이 아닌 깨달음이었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이 연민을 실천하는 기회라고,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사랑을 표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생각으로는 간단하지만, 실천하기엔 엄청난 사랑의 이야기이다.

 

수동적 축소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뇌의 작은 부분만 사용하게 된다. 우리 몸에는 운동이 부족한 근육들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 인간성의 어떤 부분들은 어떤 체험들이 일어날 때까지, -사랑에 빠진다든가, 아이를 가지거나, 죽음에 직면하는 등- 잠들어 있거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체험을 하게 되면, 생명을 얻는다. 고통은 이러한 체험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프랑스 가톨릭 작가인 레온 불로이는 이렇게 섰다. <사람은 그의 빈약한 마음속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리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들로 고통이 들어가 생명을 불어 넣는다.>  마음속의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 자리들은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 모두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거나, 좋은 모습이 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은 회한, 자기 연민, 냉소를 더 가져오기 십상이다. 고통 그 자체를 <선한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그러나 고통은 생산적일 수 있다. 우리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고통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모든 고통과 두려움은 단지 장애물에 불과 하게 된다. 그러나 성인들은 목표를 다르게 설정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존경하며 섬기도록>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사명에 충실하게 충만하게 수행하는 만큼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표를 설정한다면, 고통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과 동맹자가 될 수도 있다.

 

니체는 말했다. <나를 파괴시키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인들은 대부분 힘보다 연민을 더 고귀한 것으로 생각했다. 쟁기가 굳은 땅을 뒤엎어 물을 더 스며들게 하듯이, 고통도 굳어진 마음을 열어 더 깊은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초기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표티키의 디아도코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노동과 약함으로 시험되어야 하느님의 거룩함이라는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고통이 <십자가로 가는 왕도> 라고 하면서 그 길은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고 준비하신 길이라고 한다. 그러한 빛으로 조명한다면, 우리를 파괴시키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더 잘 간직할 수 있게 만든다.

 

프랑스의 예수회원이며 신비가였던 피에르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는 고통과 실패가 가져오는 건설적인 영향에 대해 썼다. <성인들의 삶, 그리고 일반적으로 볼 때 지혜와 선함이 출중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비하시키거나, 영영 보잘 것 없게 만들 것같이 보이는 시련, 추락으로부터 단련되고 정제되어 고귀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런 경우 실패는 마치 식물을 전지하는 칼처럼 그를 더욱 순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고통은 우리 내면의 생명수가 흐르도록 길을 열어주고, 우리 존재의 가장 순결한 성분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서 우리가 더 높이 더 강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신학자요, 고생물학자인 떼이야르는 바오로 사도의 우주적 신비주의와 진화론 및 현대우주론의 사상을 화해시키고자 했다. 그는 수십 년을 중국의 고비사막에서 인간의 유래에 관한 발굴을 하면서 돌과 화석화된 유물을 수집했다. 그는 별들의 폭발, 거대한 대륙형성, 그리고 산과 협곡들을 만들어내는 지각변동 등을 과학적 상상력으로 가능한 한 가장 넓게 관망하면서 그 안에서 생명과 우주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또한 신앙의 눈을 가지고 무생물로부터 원시적인 형태에 이어 더 복잡한 형태로 변해 가는 생명의 모든 변화 뒤에 있는 어떤 운용의 원리를 진화과정 속에서 분별하였다. 이러한 유기체들은 변화를 거듭하며 의식, 사랑 그리고 더 고귀한 영적 에너지의 형상으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떼이야르는 개인의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영적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간화의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해지는 변화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에서 뿐 아니라, 아마도 더 큰 변화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겪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떼이야르는 이것을 수동적 축소의 원리라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든 형태의 불운들이 있으며, 이것들도 수동적 축소에 포함된다. <즉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를 둘러싸는 벽, 우리 몸에 침투하는 보이지 않는 병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 한마디, 다양한 종류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들과 사고들, 비극적인 개입과 중단, 다른 것들의 세계와 우리로부터 투사되는 세계 사이에서 오는 모든 것들>이다. 또한 수동적 축소에는 이런 것들 이외에도 세월의 덧없는 흐름, 노년이라는 점차적 쇠퇴가 있다. 세월과 나이는 <조금씩 우리 자신을 훔쳐서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를 막다른 벽>에 밀어 놓는다. 떼이야르는 우리가 성취뿐만 아니라 패배에 의해서도, 우리의 힘뿐만 아니라 약함에 의해서도, 우리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참아내야 하는 것에 의해서도 형성되며, 평가된다고 생각했다. 즐거움과 고통 모두가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해방시켜서 실제의 거룩한 중심과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떼이야르 자신도 성취와 패배를 직접 경험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교회 당국은 그리스도교 신학과 진화론을 통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원죄 교리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훼손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신학적 견해를 피력하거나, 책을 출간할 수 없었다. 그는 교회 당국의 끊임없는 비난과 그의 정통성에 대한 중상 아래 연구했다. 이러한 제재는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겼으며, 수동적 축소에 관한 생각도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떼이야르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미국의 여 작가 홀래너리 오코너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 주제가 <은총을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미치는 은총의 행위>라고 서술했다. 오코너는 그의 소설에서 소시민의 덕, 사회적 지위, 자기만족적인 이성주의, 혹은 조용하고 고상한 기호 등 착각과 망상이 억지로 벗겨지고 잘려져 버린 인물들을 자주 묘사했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더 깊은 진실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된다. 오코너는 독자들에게 의미 없는 바보짓으로 여겨지는 육화, 원죄, 구원 등의 주제에 관해 써야 한다는 도전을 강렬하게 느꼈다. 가톨릭 신앙과 인간의 지성이 어울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반증으로 떼이야르 샤르뎅의 저서 글을 권유했다. 그리고 떼이야르의 작품들 중에서도 수동적 축소의 개념이 특히 오코너에게 개인적으로 강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오코너는 일찍이 루퍼스를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아버지도 같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나중에는 치료약의 영향 때문에 관절이 점차 쇠약해져서 지팡이에 의존하며 걸었다. 그래서 죠지아의 밀레쥐빌에 있는 가족 농장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고, 그곳에서 매일 아침 두 시간 정도 글을 쓰거나, 가축들을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코너는 부조리에 대해 날카로운 안목을 지니고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것과 비참한 것을 화해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감상적인 동정심을 좋아 하지 않았고, 그의 저술 활동과 병력을 연결시켜 평가하려는 비평가들에게 강한 반발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병 때문에 저술에 도움이 되는 훈련을 받았고, 우선 순위들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상이 떼이야르의 <수동적 축소> 라고 하면서, 어떤 노력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고통이나 상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고귀한 자질이라고 평했다. <나는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오코너는 <어쨌건 내가 할 일은 쓰는 것뿐이며,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그의 가장 큰 책임이 예술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삶이 진행 중에 있는 하나의 작품이라 여겼다. 그러한 삶의 의미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성공에 따라 평가받지 않는다. 인간 존재로서 우리의 가장 고귀한 책임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선물들을 사용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존경하며 섬기는 것>이라고 오코너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창조적 삶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행위는 이 세계의 재화들이 최대한으로 거기에 충만하게 활용되어야 하는 지속적인 행위이다. 긍정적인 선물들과 함께 떼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가 말한 수동적 축소까지 다 포함하여 활용되어야 한다.> 오코너는 물론 자신의 긍정적 탈렌트와 고통 등 모든 재화를 활용하여 그가 진정한 나라라고 불렀던 나라를 향해 살았다. 한 친구에게 이렇게 섰던 것처럼, <나는 결코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픔은 장소이다. 그 장소는 유렵으로 긴 여행을 가는 것보다 더 배울 것이 많은 장소이다. 또한 언제나 아무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장소이다.> 오코너는 39살에 죽었다. 그의 짧은 삶에는 소위 흥미로운 드라마가 부족하다. (일생 집과 닭장 사이에서 살았기에) 그러나 그의 삶이 피폐한 삶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신비가도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교적 신비의 핵심을 매우 깊게 살았다. 그것은 노르위치의 쥴리안이 거룩한 계시 속에서 받은 것과 같은 영감으로서, 이 세계가 그 모든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하여 죽을 만한 가치고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 하셨다는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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