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루도비꼬 신부 아버님 로마노씨가 선종하셨다. 수도회 전체가 움직여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홀로 집지킴이가 되고 만다. 오고가는 여행도 힘들거니와 현장에 가서도 짐이 되기 십상이니 자연스레 그리 몫이 정해진다.
텅 빈 커다란 수도원에서 홀로 밤을 맞으며 그 옛날 해마다 1월에 설악을 오르던 일을 떠 올린다. 서정주 시인의 말처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뒤돌아 보는게지.
어제는 남설악의 등선대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회상하다. 등선대에 오르면 한계령과 그 멋진 한계령 휴게소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루트에는 유난히도 암봉이 많다. 인수봉보다 크기만 작을 뿐 비슷한 모양의 화강암 봉우리가 눈에 많이 띈다. 그 암봉에서 인상적인 것은 화강암 의 갈라진 틈에 쌓인 한 옴큼의 흙을 비집고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소나무다. 그보다 더 척박한 환경도 드물리라. 같은 크기의 소나무라도 아마 평지의 흙에서 자라는 소나무보다 나이가 열배는 더 먹었으리라.
분명 바람에 날려 그 암봉의 바위틈에 떨어진 소나무 씨앗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밀씨도 그렇고 가라지도 그렇고 자신이 싹을 튀울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온도와 습도등 조건만 맞으면 발아하게 되어있다. 발아한 후 생존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고…….
나의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 내가 처음 받아들였던 산상설교의 말씀은 냇가의 밭에서 자랐을까 아니면 암봉위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밭에 온통 밀만 자란다면 그 마음 밭의 주인은 편벽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런 저런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자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