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에 홍수로 물난리가 나고 남부지방에도 적잖은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며 유독 서울 등 중부지방은 장마다운 비가 내리지 않아 ‘마른장마’ 인가했더니 엊그제부터 줄곧 비가 내린다. 덕분에 새벽부터 온 몸이 저리고 오그라든다. 공해병중 카드뮴 중독증을 왜 ‘이타이 이타이 병’(아프다 아프다 병) 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알 것도 같다. 오죽 하루 종일 아프면 그랬겠는가!
무릇 모든 생명은 열역학 제 2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란 구도 속에 태어나 살아가다 생을 마감한다. 무질서의 증가라는 법칙 속에서 생명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에서 부여받은 생명이 보다 적극적으로 주변의 무질서를 질서로 바꿔 나갈 때 우리의 생명은 영원이란 차원을 부여받는것 같다. 거듭난다는 것은 이미 생명 속에 상존하던 생명의 특성이 그 본성을 회복하고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 무질서를 질서로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단계를 지칭하는 것 일게다.
이렇듯 부여받은 생명의 본질을 살지 못하고 주어진 구도인 재행무상이란 대세에 순응만 하며 산다면 머지않아 그 초라한 생명이 지탱하는 삶도 무의미와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진정 자연의 법칙이나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승복하고 평온히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욥처럼 치열한 하느님과의 전면전이 필요하다. 그 전면전의 시작은 “듣는”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는다. “바다와 노인” 이 아니다. 어부인 산티아고가 그의 삶의 터전이자 그가 살아가는 장(場) 인 바다보다 먼저 나온다. 84일 동안이나 연속하여 물고기 한 마리 못 잡았지만 그는 그 나이에 다시 다음날 바다로 나간다. 이 단조로운 소설이 왜 노벨상을 받았는지 이제야 나름 이해가 된다. 노인 산티아고는 마치 선(禪)이 그러하듯 맨손으로 삶을 잡고 듣고 웅답한다. 그러기에 삶이란 허망하거나 지루한 것이라는 프레임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는 또한 요즘 현대사회에 만연한 무의미, 자기파괴 충동, 운명론, 상담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영원한 생명이란 살아있는 물고기가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듯, 산티아고처럼 대세에 그저 순응치 않고 자기혁신이란 몸짓을 시도하는 이들이 맛보게 되는 생명이다. 여기서 자기혁신 이란 것도 뭔가 중뿔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질구레함을 지향을 갖고 꾸준히 하는 것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