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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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좋아하세요? 저는 바다보다 산을 좋아하지만 이젠 아픈 다리 때문에 산을 오를 수 없습니다. 저희 수도회의 돈암동 수도원을 제외하고 우이동 명상의 집, 강원도 오상영성원도 마찬가지이지만 일곡동 명상의 집과 수도원 또한 잘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등산하는 형제들이 많습니다. 등산하신 분들은 경험하시겠지만, 산에 오르는 동안 분심으로 흐트러진 마음을 되잡을 수 있고 뒤엉킨 생각의 실마리도 조금은 정리되기도 합니다. 복잡한 세상에 얽매여 살다가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삶의 시선에 새로움을 가져다줍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모든 것이 작게 보이고, 그 좁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별것도 아닌 세상사에 얽매여 살아 온 삶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복음에서 <산>이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산 위의 삶>(Mr9,2~8)과 <산 아래의 삶>(9,9~10)으로 나누어집니다. 산 위의 삶은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을 보는 삶(3 4절)과 하늘로부터 들려 오는 소리를 듣는 삶(7절)의 순간을, 산 아래의 삶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바를 실행하는 삶의 자리로(9절) 구분됩니다. <산>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방향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9,2 3) 새하얗게 빛난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에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심으로 당신이 당하실 수난과 죽음이 패배나 실패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성취인 부활을 향한 필연적인 과정임을 미리 알려주심으로써 당신이 가시게 될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과 함께 준비하시고자 영광스럽게 변모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 뜻밖의 체험을 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베드로는 변모하신 예수님을 대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엉겁결에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9,5)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나선 높은 산에서 지금껏 경험했던 세상과 전혀 다른 새 세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베드로에게 산 아래에서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단한 삶을 깨끗이 잊게 해주는 체험이었고, 그래서 그냥 산 위에서 행복하게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높은 산에서 보면 세상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끔 산에 오르면 세상의 시름을 다 잊고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도 커집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자신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갈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우리 모두)의 마음 저변엔 고통스런 현실에서 탈피 그리고 고통도 없고 힘듦도 없는 새로운 현실로 도피해서, 그곳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에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9,5) 눌러앉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계시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자신 혼자만의 평화와 안락을 위한 일에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신앙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일이며 하느님을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는 삶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자기중심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이 변모 이전에 주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Mt16,22)고 반박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라고 질책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아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몰랐기에, 부활을 위해 겪어야 할 고난과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제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초막 셋을 지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에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자신이 바라는 평안을 영원히 누려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겠지요. 
          

이처럼 현실보다 환상 속에 안주하며 멈춘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위안과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잘 따라 걷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선물에 마음을 빼앗기며, 선물을 주는 사람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유아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안에 집착하고 평안에 몰두하기 마련입니다. 참된 평화란 어려움을 통해서 주어짐을 잘 모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란, 사랑에 힘입어 산에서 내려와 그분이 가신 십자가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고, 십자가 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할 때 그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겪고 체험한 예수 살기를 통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8,31)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8,38~39참조)
                                                 

신앙이 무엇인지를 미처 깨닫기 전에 수도회에 입회하면서 제가 수도 생활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점은, 신앙이란 보고 들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함에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은 참된 믿음의 표본입니다. 곧 신앙인이란 듣는 존재이며, 들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미래 약속의 보증인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감당할 수 없는 요구에 응답하여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자, 하느님께서 그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다른 번제물을 내어주시며 축복을 빌어 줍니다.(창22장 참조) 또한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 많은 들음에서 삶으로까지 이끌었던 말씀은 사도 바오로가 선포했던 <십자가의 복음>(1코1,18~25)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그리스인들과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지혜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이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때, 그로 인해 큰 어려움과 고난을 겪겠지만 그 말씀으로 세상에선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매일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하느님의 얼굴’ 뵙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곳에서 들은 말씀으로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앞서가신 주님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 파스카 여정의 삶을 바로 화답송의 후렴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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