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1.04.14 10:50

<부활 신앙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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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부활 대축일부터 오늘까지 제 마음에 무겁게 다가오는 <믿음이란 진정 무엇인가?>라는 의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본 이들의 말을 듣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Mr16,13.14) 그리고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Jn20,29) 이번 주 월요일부터 요한 복음 3장부터 계속해서 들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에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니코데모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의문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이 질문은 단지 니코데모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질문입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이란 단순히 신심이 아닌,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내면의 어둠에서 차츰 온전히 신앙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를 수용하고 그 진리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한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7.8) 즉 바오로는 <위로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나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하느님의 질서와 하느님께서 뜻하신 삶의 방식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가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은 다름아닌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믿음의 승리이고, 그 믿음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1Jn5,4~5참조)이라고 선언한 사도 요한의 체험과 동일합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참된 부활 신앙과 영성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예전 세나투스와 춘천교구 수녀 연합회에서 한 강의록을 수정 보완해서 보냅니다. 부활 시기를 살고 계시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2번으로 나눠 보냅니다.                  

&&&&&       
그리스도인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파스카에 참여하고 체험하면서 이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파스카 여정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신비이다. 하느님께서 결합한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아니 된다. <마치 세 잎 클로버 잎처럼== 삶-죽음-부활>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그가 살고자 했던 그분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삶과 유리되었기에, 예수의 죽음은 그 논거를 잃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여러 애매모호한 해설을 낳게 했다. 즉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잔인한 하느님의 상(象) 곧 왜곡된 하느님의 이미지, 그리고 엉터리 구원사 즉, 하느님의 자비로운 주도권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희생에 의해 설명되는 그리고 부정적인 영성 곧 사람들 상호간에 사랑에 중점이 있지 않고 고통의 가치에 역점이 주어지는, 끝으로 삶에 대한 크리스챤들의 빈약한 이미지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투신하려는 삶의 방식을 따르기보다는 구속적인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것을 성사적으로 획득하려고 공로를 쌓음에 치중하는 모습> 등으로 드러났다.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살아온 모습과도 같다. Quale vita, tale morte.>는 표현이 있다. 이는 한 사람의 죽음은 그가 살아 온 모습을 이해할 때 그의 죽음의 의미는 이해된다는 표현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분께서 살아온 삶, 사도직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묶고 눈멀게 하며 억눌리게 하는 상태(루가4,18~19참조)에서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고 투신(=수난을 의미하는 단어 passion의 의미는 한 사람이 무엇인가 열정으로 그것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는 것)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하심을 실행하신 사랑의 절정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당신이 살고자 했고 살았던 삶의 가장 탁월한 증거이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10,18)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의 가장 압도적인 표현이며,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 온 삶을 이해할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실패로 끝나지 않은 죽음이며, 그 자신이 살고자 했던 <타자를 위한 존재>(요13,1) 방식을 통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10,10) 드러낸 예수님의 삶의 절정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역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가신 파스카의 여정,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을 걸을 때 참된 진리와 충만한 새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부활의 신앙은 그러기에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서 가신 파스카의 여정을 통과해야 한다. 교회는 이 진리를 아주 단순하게 삼종경 기도문(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에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진리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단지 우리가 이를 자각하지 못했고,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낱 기도문으로 전락하였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에로 나간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짧은 예화가 부활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 애벌레 이야기(애벌레가 나비가 되어가는 변화과정)
    * 트위트윗의 교훈(새장에 갖힌 새에게 새장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죽은          척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다는 교훈) 
    * 큰 죽음(大死)과 큰 삶(大活)의 역동성;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17,1) 이 기도에 의하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부의 영광이 드러나는 동시에 성부께서는 성자의 영광도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 자신이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말씀에도 같은 뜻이 표명되어 있다고 본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3~24)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는 십자가상의 죽음이 영광과 직결되어 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대사와 대활의 경우와 똑같이 죽음과 부활은 즉(卽, 바로 그것)으로 직결되어 있기에, 십자가 즉 부활, 부활 즉 십자가, 십자가는 바로 부활이요, 부활은 바로 십자가라고 믿는다. 
    *<싹터 나오는 모든 생명을 한번 눈여겨보면,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우리 마음을 노상 에워싸는 근심 걱정도 잊게 될 것이다. .... 참으로 생명은 죽음에서 나오며, 부활은 하나의 전면적 파괴 곧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찬란한 빛을 발산한다.>(카를로 카레토의 도시의 광야에서)

그런데 부활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평신도-수도자-사제로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비움의 삶, 낮아짐의 삶, 자기 죽음>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자의 삶을 저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표현하는데 부활을 살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자신을 죽이는 삶(=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살기 위해)을 살아야 한다. 주님처럼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타자(=이웃, 벗)를 위해 죽지 못하는 우리 신앙이, 인생이 부활을 살지 못하는 이유라고 느끼고 깨닫는다. 그분은 우리 또한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썩어 없어진 밀알은 결코 그 모습대로 다시 살아나지 않지만, 존재할 수 없지만, 그 밀알은 새 생명을 알리는 표징이다. 새 세상, 새 역사를 열어 주는 표징이 되는데, 이는 결국 밀알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 밀알이 지금의 누구일까요?(=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영혼들!!!)

부활은 이처럼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지 않고서는 자기 몸에, 자기 인생에 부활 사건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 부활의 삶을 자기 삶 안에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은 단지 생의 끝에 오는 사건만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며, 매번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다. 부활은 죽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부활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매번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 살기 위해 죽음을 거부하는 욕심은 매 순간 죽는 것을 거부하기에 그런 사람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매번 죽지 못한 사람은 참사람의 참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능동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의 행위가 곧 진리를 깨달은 존재의 자유의 행위이며 부활을 향한 투신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당신의 유작인 <신비적 죽음>에서 이를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성인의 매일 매일 신비적 죽음을 실천하셨다. <나는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이 나에게서 없어져버릴가봐 두렵다.>

십자가상에 못 박히신 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23,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이는 곧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죽음만이 부활에로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먼저 자기 죽음을 통과하여 죽음을 극복한 사람이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3,10) 부활을 믿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죽음을 통과한 사람이며(=영적이며 신비적 죽음을)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안내한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 곧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진리이다. 우리는 세례로 이미 죽은 존재이다. 더욱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받아 먹어라!>고 내어 준 몸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죽음에서 내어놓은 몸으로, 이를 통해 우리에게도 영적이고 신비적 죽음으로 매일 매일 초대하고 계신다. 그분이 우리를 죽음에로 안내하고 초대하신 것은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역시다른 사람들을 부활에로 초대한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6, 3~4)


<부활의 신앙과 영성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왔던 부활을 재발견하였다. 애석하게도 부활이 잊혀진 동안 고난도 잊혀졌다. 과거에 부활은 예수의 죽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예수의 죽음이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가볍게 취급되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이란 곧 이어올 부활이 중요하기에 잊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취급된 것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부활은 단지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내세를 위해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이란, 하느님이 예수의 삶을 엄숙히 받아들여 승인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 까닭은 예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온전히 하느님의 뜻 곧 사람을 살리는 일에 투신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갈바리아로부터 시선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우리의 눈을 고정하길 바라신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자기 당대의 악을 예리하게 파악하시고, 가장 효과적인 구제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임을 역설하였다. 그분은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압도적인 사랑이 바로 십자가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회헌2항참조)가 그곳에 있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가장 충실히 응답한 한 인간의 증언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르꼬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백부장의 고백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구나!>(마르15,39) 이는 곧 우리의 부활 신앙으로 이끌어 준 고백이자 초대이다.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진정 부활을 관상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또한 백부장처럼 죽음 속에서 부활을 앞당겨 볼 수 있었던 ‘영적 시선과 관점’으로 가득 차서 현세의 고난 중에 부활을 예언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역사에서 유사성이 전혀 없다.>고 폰 발타살은 언급하였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새롭고도 놀라운 신비였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발현을 목격했음에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활 시기에 주로 듣는 복음이 요한 복음이고, 독서가 왜 사도행전인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초대 교회의 관심사는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효과에 있었다. 초점은 예수의 인격과 행적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를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부활 이후 성령을 받고 난 뒤 비로소 제자들은 스승의 인격과 언행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참조: 요한 2, 22/ 12,14-16) 제자들의 새로운 이해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로지 성령 때문이었다.(요한14, 26) 따라서 성령은 예수의 인격과 행적을 바르게 비치어 나타나게 하는 진리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다. 예수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전달하는 그분이시다. (사도 2, 33/ 요한 16, 13-14 )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왜 굳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길을 걸으셨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길을 통해 참된 진리와 생명에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16,13)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자,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이고 절실하게 필요한 삶의 태도와 자세를 저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머무실 자리를 내드리는 일,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일이 없다. 성령께 자리를 내어 드려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 대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고 되돌아오셨기 때문이다. (요한 20, 19-23) 예수님께서 먼저 사도들에게 다가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심으로 스승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배신과 잘못’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용서’를 베푸셨다. 이렇게 끝내 원한이라고 품는 일이 없는 예수님의 마음, 곧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제자들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직접 상처받으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는데, 이 상처는 바로 확고부동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에 대한 사랑의 영원한 표지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돌처럼 굳은 마음에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면서, 이 ‘놀라운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의 선물인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20,23) 예수님의 사도직 활동 전체는 한 마디로 <용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고, 이 용서를 통해서 인간은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새로 태어남>, 성령 안에서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두려움에 떠는 마음으로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은 두려움을 이긴 평화의 상태에서 깨달을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 거듭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기원하셨다. 마음의 평화는 주님 현존의 표지이며, 이는 주님의 선물이다. 교황 요한23세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진리-정의-자유-사랑이란 기둥을 세우면 주님께서는 평화란 지붕을 선물하신다.>고 하셨다. 이에 반해서 우리가 진리가 아닌 거짓, 정의가 아닌 불의, 자유가 아닌 속박, 사랑이 아닌 미움이나 무관심의 상태에서는 평화란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평화는 바로 주님 부활의 선물이며, 이는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평화를 느낄 때 살아 계신 주님을 느낄 수 있으며, 또 주님의 살아 계심을 느낄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평화가 부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의 증거는 바로 우리가 평화를 느끼고 누릴 뿐만 아니라 평화를 이루고 촉진하는 삶을 살아갈 때 드러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하느님처럼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용서의 실천 여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판단기준이다. 주님은 세상에서 용서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셨기에 자주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존재로 용서를 실천하신 분이시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는 죄를 지었으니까 뉘우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벌써 다 용서하였다.>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가 참회자의 행동(=흔히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는 5가지 조건: 성찰, 통회, 결심, 고백, 보속)을 앞지르고 있으며, 참회자의 참회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힘도 참회자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와 자비의 활동이며 역사하심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는 가르침은 간음한 여자의 일화에서 잘 드러나 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8,11) 이처럼 부활을 증거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화해의 직분을 맡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절입니다.>(2코5,19) 이미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죽은 이들의 부활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15,17) 그런데 이 문장의 표현 순서를 바꾸어 보면, <여러분이 아직도 죄중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은 셈입니다.>라고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더 선해지기로 결심을 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께서 내게 부활하시거나 부활의 선물인 평화-용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에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신뢰하고 주님께 두려움 없이 의탁할 수 있다. 복음이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자랑스러움이 아니고 주님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먼저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심에 감사하며 내어 맡김이다. 

부활하신 그분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처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어떤 처지와 상태와 관계없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그분처럼 용서를 베푸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싶다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과 함께 부활의 삶을 살고 싶으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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