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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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어제 저의 첫 강의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웰빙 바람은 새삼스러운 움직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수도 생활이 바로 웰빙적인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고적으로 짧게나마 수도원의 오래된 치유와 관계해서 의술의 성녀인 빙엔의 힐데가르트 수도원장을 언급하고 본 강의를 시작할까 합니다. 성녀는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병든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찾아오셨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나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능력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기초하여 덕을 쌓으면 스스로 치유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치유의 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덕을 무기 삼아 질병의 근원 요인, 즉 인간을 아프게 만들고 비인간적이고 유령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는 악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가 가르친 삶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생명의 에너지를 길어 올려라. ◀ 올바른 식사 습관을 준수하라. ◀ 신진대사가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라. ◀ 인간을 위해 우주가 준비해 놓은 치유의 능력을 활용하라. ◀ 활동과 휴식의 적절한 배분과 균형에 유의하라.

 

다들 자동차 운전하고 오셨지요.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출발지로부터 멀어지고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지난 온 시간과 공간은 늘 그만큼 그 거리를 두고 백미러에 담겨 뒤따라옵니다. 과거의 영상은 점차 작아질 것 같지만 인생의 주행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올 때가 있으니 참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그만큼의 거리로 우리를 뒤따라옵니다. 그러기에 쉐렌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이란 앞쪽으로 살아가지만, 뒤쪽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처음 본당신부로 부임하던 날을 어제와 같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97년 1월 8일! 부임해서 3일째 되던 날 늦은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가 사제관으로 걸려 왔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 온 목소리는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았습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그것도 늦은 밤에 걸려 온 그 전화는 저를 무척 불편하게 했습니다. 통화를 하다 보니 그의 횡설수설함이 더욱 짜증스레 하였지만. 통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가 저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취중에 제게 전하고자 하는 뜻은 이러했습니다.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후 처음 부임한 본당신부인 저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첫째 지금껏 만났던 신부님들에게 느꼈던 점은 한 마디로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둘째 자신은 집안 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제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아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와 대면해서 말할 용기가 없었기에 술을 핑계 삼아 늦은 밤 저에게 전화했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늦은 밤 예수님을 찾아온 니코데모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의 표현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고 사실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제로써 수없이 사랑하라고 말해왔지만 사실 사랑이 없고,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전화로 제게 전한 진심은 처음으로 본당에 파견된 제 사목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려주는 길잡이와 같았습니다. 이 권고는 온실과도 같은 수도원이 아닌 거친 벌판과도 같은 본당신부로 살아가야 할 저를 흔들어 깨운 자명종 소리와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영세 후 2년 만에 수도회 입회해서 줄곧 온실과도 같은 수도원에서 살아왔던 저, 본당 사목에 있어서는 초보자인 제게 본당 사목의 최우선적인 사목 방침을 제시해 준 것과 같았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스티븐 코비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헌법은 살아남아 오늘도 중대한 기능을 다하고 있다. 올바른 원리, 즉 독립 선언서에 담긴 자명한 진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확실하게 변화하는 중에도 그 원리가 헌법에 시간을 초월하는 힘을 준다. 개인의 경우, 올바른 원리에 기초한 개인 사명 선언서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명 선언서는 개인의 헌법이 된다. 인생의 방향을 가르는 중대한 결정의 기초가 된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온갖 상황과 감정 속에서 하루하루 내리는 결정의 기초가 된다. > 더욱 그 사명 선언서의 초점이 우리의 일이나 활동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 있을 때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날 것입니다. 저는 사제란 <가르치고 성화하고 다스리는 직무를 수행한다.>고 배웠지요. 그리고 말씀을 전파하고 잃은 영혼을 찾으며 신자들을 사목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제와 신자들의 주된 사명 선언서가 만일 <말씀을 전파하라>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Mr12.30~31)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교회와 본당 공동체 그리고 세상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 어쩌다 보니 오늘 복음과 같네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질문하나 할까요? <혹시, 이 세상 사람들이 제일 많이 어기는 법이랄까 계명이 뭔지 아십니까? 힌트를 준다면, 특히 수도자들이 더 많이 어긴 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즉각 대답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큰 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변을 잘못하는데, 그 죄는 바로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은 죄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우리 센타에 찾아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 종교단체를 벌써 두세 군데나 들렀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지요. ‘이 게으른 사람아! 일자리를 찾아봐야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말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우리 센타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녀의 품에 있던 아이를 받아 안았습니다. 그 아이는 내 품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안에서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워 도저히 십자가를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도 많은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이 작은 아이에게 우유 한 잔도 주지 못하다니!>

 

수도자이자 사제인 제가 너무나 자주 어기는 계명, 온 교회가 어기고 있는 계명! 마더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경험에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녀가 한 서원은 가장 어려운 서원이었습니다. <너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전파하라. 사랑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바로 거기니까.> 제가 아는 어느 할머니는 만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늘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할머니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늘 ’주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하였지요. 이는 곧 그 할머니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렇게 사람들에게 묻고 자신이 사랑의 삶을 사셨다고 봅니다. 그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십니다. 저 역시도 남은 시간이 분명 지나온 시간보다 길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면서, 자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삶의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중요한 질문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 이 강의를 했던 2006년이 아닌 2021년 지금, 저에게 다시 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누워서 잠들기 이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우리 하루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주님 오늘 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이런 질문에 ’네‘라고 응답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나는 오늘 사랑하며 살았나?>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루를 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 입니다. <적은 사랑으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랑으로 적은 일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매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곧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기 위해선,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이신 주님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께 나아와서 사랑의 성체를 먹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지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사랑의 존재여야 하고, 사랑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으로 들어가서 함께 머물고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우리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를 님과 같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 37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길지만 읽어보렵니다. <나는 하느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 함은, 사랑은 내 존재 이유라 함과 같으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참 나다. 내 욕심을 차리지 않은 것이 참 나다. 사랑은 나의 참 성격이다. 사랑은 내 이름이다. 그러므로 만일 순전히 하느님의 사랑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 무엇을 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알거나, 바란다면 내게는 기쁨도 평화도 안식도 충족도 깃들일 수 없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하느님의 본질인 성소, 사랑이 감추인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임의 거룩함에 들어가려면 임이 거룩하심과 같이 나도 거룩해야 하며, 임이 완전하심과 같이 나도 완전해야 한다. 이는 내가 아무리 애쓰고, 나와 싸우고 남과 다툰다 할지라도 하나도 이룰 수 없다. 오로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고 쫒아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기꺼이 버리는 길 밖에 없다. 사랑이 없는 나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이 나를 임과 같게 만들어 주셔야 한다. 임이 임이신 임의 사랑을 내게 주시고, 내 안에서 사랑하시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같이 하시면 나는 틀림없이 임이신 사랑이 될 것이다. > 사랑이 되기 위해선 사랑이 나를 임과 같게 만들어 주셔야 하는데,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인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몸과 피를 매일 먹고 마시는 사랑의 ‘식인종’(?)입니다.

 

최후 만찬에 대한 기록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최후 만찬에 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사도들을 향한 그분의 각별한 사랑에 매우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극진한 사랑을 끝까지 보여 주시지요? 그분은 겸손의 표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섬김의 사랑으로 발을 씻지 않으면 그들은 이제 그분과 아무 상관이 없어지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인생을 걸어오면서 묻은 때, 허물과 죄를 씻어주시고 새로운 인격으로 내세우려는 듯이 발을 씻어주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심으로 그들의 몸을 씻어주어 치유와 정화를 하신 다음, 그들의 영혼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아 처음으로 자신의 몸인 성체성사의 빵을 떼시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자들에게 간곡히 단단히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는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의 본本을 보여 주심이며,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따라 살아야 행동의 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옷은 색상과 옷감과 스타일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그 차이 위에는 같은 옷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시작되었으며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사랑하심으로써 끝내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의 옷본을 받은 제자들은 그 옷본에 맞춰 그들 역시 동일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Jn13,34) 왜냐하면 거룩한 성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 당신이 아버지께 사랑을 받았고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그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 계명은 신구약 성서 전체를 요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한 감사의 성체성사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완성하셨습니다. 즉 그분 자신, 그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영혼과 몸을 우리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전달하는 그분의 성령이 그것입니다. 계명과 성사의 목적은 같습니다. 즉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하나가 된 것같이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Jn17,21-22)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남기신 유지는 곧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 이를 위해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사랑의 생활 자체가 성체 성사적 삶의 실천이며, 그리스도와 일치이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간의 일치가 됨을 사도들과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남기셨습니다.

부활 체험이 그러하듯이 성체의 현존체험은 바로 성령 체험의 결과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성체는 교회를 형성한다.>성체성사의 의미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배경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성찬의 삶을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다.>(2,46~47) 성전을 방문하고 빵을 떼는 것이 매일의 그들 일과였음을 알 수 있으며, 식사의 특징적 분위기는 기쁨이었고 순수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 세상에 있었을까요? 네것 내것이 구분이 없는 상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매일 매일이 잔치이며 축제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랑을 먹고 마시는 일, 그 사랑을 나누는 일보다 더 거룩한 일, 성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식사야말로 친교의 가장 탁월한 표현이며 일치의 현실이 아닙니까? 식사의 재료 또한 일치와 친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많은 밀알이 으깨어져 한 빵이 되듯이, 많은 포도알이 으깨어져 한 잔의 포도주가 됩니다. 물론 성찬례의 재료가 담고 있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재료보다 중요한 의미는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눔이고, 나눔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1코린토 10,16~17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은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나눔은 사랑이고, 나누는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합니다. 동일한 사랑을 먹고 마시는 성찬례는 비가시적인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표지하는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친교와 일치는 사랑의 식탁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심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식사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서인국 교수는 4월 12일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행복의 절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데 있다’고 하더군요.) 예수님께서는 자주 당대에 멸시받던 죄인들,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죄인들, 왕따 당한 사람들, 행실이 방정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이로 인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죄인들과 함께하는 식사는 단지 외적인 행위, 먹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지요. 예수께서 하신 식사는 단지 식사가 아닌 소외되고 상처받은 그들을 한 인격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고 한 마디로 사랑의 몸짓이고 나눔이며 연대였잖아요. 성찬은 사랑의 잔치이며. 이 잔치는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식사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난한 자가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다시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할 기회를 줌으로써 지체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잔치에, 식사에 참여한 마당에 형제를 향한 진실하고 따뜻한 사랑의 나눔이 없이, 단지 머리로서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진솔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기에 초대 교회 공동체의 성찬례 자리에는 말씀의 봉사와 곤궁한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함께 결합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마당에 있어서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죄인들이나 창녀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은 그 나눔의 진실성의 척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잘 알듯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우울한 일요일’이란 영화에 보면 주인공의 <무시 받기보다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성체의 빵은 쪼개진 빵이며, 미사는 곧 빵을 쪼갬으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빵을 떼거나 쪼개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과 우리의 부서지고 으스러진 생명을 연결하는 순간이며, 이제 이 부수어진 생명은 더 이상 분열, 분리되지 않고 공동체의 사랑으로 변형됩니다. 지금껏 상처받음과 부서짐은 부패와 파멸의 시작이었으나 예수께서 스스로 으깨어지고 쪼개짐으로 새로운 희망의 표지로서 축복받는 생명의 출발이자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는 유언은 단지 전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너희는 내가 살아온 삶, 그리고 성찬에서의 나의 현실 그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찬 안에서의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고 자신을 나타내는 교회의 그 구성원들은 하나의 선물이 될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든 이에게 사랑과 봉사를 위해 나누어야 할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먹혀질 빵이 되고 마셔질 술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성체적 삶은 실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도 빵의 모습으로 오심은 그냥 받아먹고 입을 쓱 다물라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당신 닮은 사랑의 인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신 것이지요. 사랑의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랑을 먹고 사랑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체를 영하고도 새로운 인간으로 탈바꿈하지 못한다면 비료를 주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주님의 저주를 받기 마땅합니다. 성찬례 중의 놀라운 변화란 빵이 성체화 되는 것처럼 그 성체를 모시는 우리가 그리스도화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듯이 보통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처럼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예수님께서 강생하시고 당신 몸을 나눠주러 오신 것입니다. 사제로써 미사를 드리는 것이나, 신자로써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또 하나의 빵이 되고, 술이 되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로써는 이 말을 들을 때 마음 아픈 순간이기도 합니다. 미사에 참여하고 그분의 몸을 모시는 것은 우리 역시 그분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사랑이 없다고 한탄하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으라! 그러면 사랑이 싹트리라.>는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의 밀알이 되어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꽃이 없다고 한탄한다고 꽃이 피는 것이 아닙니다. 꽃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나 하나쯤 희생한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라며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에서 2002년 월드컵은 우리 모두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가장 최상의 절정감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감을 회복할 때이며, 이런 차원에서 축구 경기가 있는 날마다 사람들이 거리로 운동장으로 모여 응원하는 것은 바로 이 자신감의 표현이었으며, 새로운 기운이 싹튼 순간이기도 합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나 하나 쯤 빠져도 되겠지’라며 자신을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은 돼지계산법이 아니라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신 하느님의 계산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만을 믿는다!>고. 이제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Jn12,24~25) 내가 사랑의 밀알이 되어 떨어져 죽으면 백배의 사랑의 밀알이 생겨나고, 그 백배나 되는 밀알이 또 떨어져 죽는다면 만 배의 사랑의 밀알이 생길 것이고,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면 나의 희생이 보잘것 없고, 하찮은 것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하나쯤 하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매일의 생활은 대부분 소소한 일들로 참 평범하지 않습니까? 평범하고 진부한 일이지만 하느님 때문에 특별한 일처럼, 거룩한 일처럼 행한다면 이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화려한 일을, 특별한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찮고 평범한 매일의 삶과 활동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봉헌한다면,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이 될 것이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을 잘 사는 것이야말로 완전함의 정점이요 가장 어려운 일이다.>고 하였지요. 예수님은 <네가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한 것이 그 무엇이든지 그것은 다 나를 위해서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체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에 대한 사랑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은 가정 안에서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까이 혹은 멀리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와 삶에 있어서 얼마나 실제적으로 응답하고 있는지, 그 여부에 따라 성체성사에 대한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의 현존을 나라는 존재의 마음 안에서, 이웃에서, 모든 사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 내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나 자신이 성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체는 나에게 위로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사실 멋모르고 살 때가 편했는데 알고 나니 부담이 더 됩니다. 매일 먹혀진 존재, 쪼깨진 존재, 부서진 존재가 된다는 것, 그래도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이 보람이요 기쁨이며 존재 이유가 아닐까요?

 

예수님의 활동 반경과 기간은 지극히 한시적이고 제한적이었지요. 갈릴레아에서 소수의 사람에게 3년 동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구원적 사랑의 활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동시대 사람들의 가장 깊은 욕구, 곧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건드리심으로 사랑받은 그들이 자신을 넘어서 이웃에게로 나갔고, 사랑하도록 깨우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이며 존재 이유라는 점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사랑받으면서 사랑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변화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곧 이웃이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내 이웃 중에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나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진실성을 드러나게 합니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나라는 존재와 활동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 내가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나 자신이 성체적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젊은이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문제, 제3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먼 곳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는 구실로 네 가까이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예를 들어, 네 어머니를 생각해봐라. 어째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가? 너에게 가까이 있는 불쌍한 사람이 네 스승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 사람을 무자비하게, 또 하찮게 대하는가? 너는 평화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싸운다고 했다. 하지만 ‘저들이 평화, 평화라고 돌아다니지만 평화는 흔적도 없다.’라고 했던 예언자 예레미아의 말이 너에게 해당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 가르침은 단지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지 않은 곧 우리의 문제입니다.

 

일상을 살면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 올곧은 사람을 칭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하셨던 사람들, 즉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감수성과 감정으로 넘쳐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지순례도 빠트리지 않고, 피정이나 철야기도도 열심이고 또한 종교적인 훈련을 통하여 ‘내적인 행복의 감정’ 속에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살레시오 성인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고 강조합니다. 일찍이 야고보 사도도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셨지요.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4.17)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동은 순수한 사랑의 운동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해 “예” 하느냐 “아니오” 하느냐,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지요. 이 세상의 역사는 사랑할 능력이 없는 세력과 사랑하는 세력 사이의 투쟁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오스딩 성인은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도 있다고 말했지요. 사랑이 없다면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는가?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잘못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체성사를 받아 모실 수 없는 외딴 곳에, (* 코로나 펜데믹 시기처럼 대면이 아닌 비대면의 상황에) 살게 된다면, 어떻게 나의 삶을 성체와 같이 떼어 쪼개져 남과 나누며, 어떻게 남을 위한 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책에 있어서 읽었던 부분은 인용하렵니다.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지역으로 파견된 어느 수녀가 수도원으로 돌아오려 할 때 흑인 여성이 조그마한 바구니에 거친 빵을 주자 그 바구니를 들고 귀원했다고 합니다. 수녀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제발 받으라고 해서 받아왔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고 난 뒤 그 수녀는 본국에 있는 동료 수녀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나는 미사에 참석할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수녀님들이 본국에서 미사참례를 하러 가실 때마다 나도 함께 데려가십시오. 그러면 나는 여기서 이 가난하고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성체를 당신들의 이름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성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성체를 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을 받아먹어라> 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을 하나의 빵으로 남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주신 삶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라는 빵’을 남과 나누고 우리의 ‘삶이라는 성혈’을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적 삶이고 영성입니다. 곧 조건 없는 사랑, 서로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 자신은 곧 성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곧 예수님의 실제적 현존을 예수님의 몸인 우리의 삶을 가지고 나누고, 빵으로 남에게 주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인 참된 양식, 실제적인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 자신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번 성령대회의 마지막 강론을 마치면서 안도현의 <연어>의 한 장면을 인용하고 끝낼까 합니다. 은빛 연어는 초록강을 거슬러 태어난 곳으로 올라가면서 초록강에게 묻습니다.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그러자 초록강은 은빛 연어에게 삶의 존재 이유란 <단지 여기 존재한다는 그 자체야> 라고 말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라고 답합니다. 은빛 연어는 다시 묻습니다. <배경이란 뭐죠>라고, 이에 초록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감싸고 있는 것, 나는 여기 있음으로 해서 너의 배경이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그리고 성체를 통해서 늘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시지요. 우리를 감싸 안아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에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힘이 되어주고, 길이 되어주며, 빛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줍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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