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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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부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예수성심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에 부족한 저를 초대해 주신 주교님께 특별히 감사 드립니다. 사실 강의를 부탁받았을 때 처음에 거절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준비하면서 사제생활, 특히 본당신부로 살았던 제 삶을 회고하고 성찰할 기회가 주어져 참 좋았습니다. 저는 예전 제주교구 표선 본당에서 잠시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했으며, 관구장 소임을 끝내고 현재는 경기도 안성 노인중증 병원에서 원목신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먼저 드는 생각은 시간은 흐르기에 아름답고 공간은 변하기에 더욱 거룩하다는 점입니다. 단지 저만의 생각이나 느낌은 아니라고 봅니다. 살아 온 세월만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육체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영적이고 신앙적 눈이 열리면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그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시간은 흐르기에 아름답고 공간은 변하기에 더 거룩하다고 느껴지는 지금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인생이란 늘 앞쪽으로 살아가지만, 뒤쪽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결국 지나온 삶의 시간과 살아 온 자리를 되돌아보면서,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제의 길과 삶에 대한 확신이 예전보다 더 깊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바둑을 두지 못하지만 보는 것을 참 좋아했었습니다. 바둑을 두신 신부님들은 이내 이해하시겠지만, 초급자인 18급과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9단과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초급자는 바둑판을 볼 때 부분을 보기에 앞에 놓인 한 수에 집착하지만, 고수는 전체와 몇 수 후를 미리 내다 본다는 것 아닙니까? 즉 부분을 보는 눈과 전체를 보는 눈의 차이처럼 이런 깨달음이 곧 거룩한 삶의 시작이라고 저는 봅니다. 거룩한 삶, 거룩한 생활이란 모든 덕을 다 갖춘 상태라기보다, 사랑하면 눈이 열린다는 말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과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눈의 열림,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기식 대로 보려고만 했던 관점에서 하느님의 시선에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인적인 삶이 거룩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자의 수도 생활은 한 마디로 시간과 공간의 성화聖化라고 저는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시간은 매일의 일과표와 수도자의 양성 단계를 말합니다. 공간은 수도자의 삶의 중심 장소인 성당, 일하는 장소인 소임지, 사랑의 나눔의 자리인 식당, 그리고 침묵과 고독의 장소인 침실입니다. 시간이라는 의미는 공간이란 의미와 직결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바로 그 공간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간은 시간과, 시간은 공간과 함께 작용하며, 이런 시공간을 넘나드는 단조로운 반복 가운데서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께로 몸과 마음이 정향定向되고, 하느님께 집중해 나가는 단련의 연속이 바로 수도자의 생활입니다. 이런 반복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성화에로 이끌며, 이는 더 나아가서 존재의 성화와 삶의 성화에 도달한다고 저는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 놓여 있는 곳에서 하느님께 집중하고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높여 가는 삶이 바로 성화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의 흐름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거룩한 삶이 성취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내적 위기를 통해서, 성 아오스딩처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깊이 느끼고 고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몸부림, 참삶에 대한 갈망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사제인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타성에 젖어 살다 보면 부부 사이 권태기처럼 하느님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냉담한 시기를 만나게 되고, 모든 게 귀찮고 형식적이며 무의미한 일상을 겪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새로 부임한 교사 키팅은 첫 수업에서 <우리가 시를 배우는 것은 단지 시가 좋아서 시를 배우는 게 아니고, 시를 통해 인생의 아름다운 열정과 낭만을 배우는 것이다.>는 표현을 들으면서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배우는 것은 신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셨던 인격과 삶을 배우고, 그분처럼 살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흔한 표현으로 작은 예수가 되고, 예수 살기를 의미합니다. 타성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선에서 사제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자극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삶뿐만이 아니라 신앙이나 사제생활도, 제대로, 온전히 살려고 한다면, 내면에서 솟구치는 소리, 의문을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레닌은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한 걸음 나가고 두 걸음 물러서라.> 저는 이 표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한 걸음 나간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과 교회나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흔한 말로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잖습니까? 나와 너 그리고 교회와 세상의 문제를 묻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또한 두 걸음 물러선다는 것은 귀를 기우려 깊이 듣는 것, 곧 기도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게세마니의 체험이 바로 그 원형입니다. 內省에 따른 깨달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처절한 육체적, 심리적, 영적인 고통을 체험하고 그것과 싸우면서 자신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이루고자 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경륜을 내적으로 수용하고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투신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사제의 신원과 역할이 무엇인지는 단지 의식이나 머리로써 깨닫는 게 아니라 뼈저린 삶의 체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가 사제가 되고 사제로써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선택과 결정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자유롭고 거룩한 은총이며 사랑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베르그송은 <성인은 말이 필요 없고 존재 자체가 문제이다.>고 말했습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존재와 행위, 신원과 직무는 서로 밀접하고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갖습니다. 오늘날 수도자의 신원 위기를 말할 때마다, 거론되는 것은 ’수도자란 무엇을 할까보다 무엇이 될까‘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활동이 우선하고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활동이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경험적으로 볼 때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과 닮지 않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일 것입니다. 헨리 뉘웬이 미국 C.T.U의 학위수여식에서 <존재는 활동보다 더 중요하고, 마음은 정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현대의 사제양성 31항‘에서 <사제는 머리이시며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제의 영성 생활을 활기차게 해주고 이끌어 주는 힘, 즉 내적인 원칙은 목자로서의 사랑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신 목자로서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이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첫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목자로서 사랑이 모든 사제의 내적인 생활의 원칙이며, 외적인 사목활동의 원리임을 교황님께서 명백히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참된 목자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저는 오늘 시편 22장을 신부님들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본을 사용했습니다.

 

1. <1절: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어쩌면 예수님은 시편 22장에서 언급한 목자의 마음을 알고 계셨기에, 이런 맥락에서 당신 자신을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잘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잘 압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요한10,14~16) 듣고 안다는 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를 안다는 것이며, 목소리를 안다는 것은 목소리의 임자를 아는 것이지요. 듣는다는 것은 서로를 깊이 아는 것이고 이것은 곧 사랑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어떤 처지에서든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목소리의 임자를 아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목소리에 익숙하고 민감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비록 그 모습이 변했을지라도 목소리를 듣고 이내 사랑하는 분을 알아냅니다.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스승님‘하고 불렀다.>(Jn20,16)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막달레나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앎입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수도 생활의 첫 입문은 수련기이며 이 수련기의 목적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느님을 아는 만큼 더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우리 자신을 아는 만큼 더 하느님을 알게 되는 관계입니다. 물론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사제 생활도 하느님과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앎의 관계 그리고 그 앎의 강도를 심화하는 관계 생활입니다. 성 아오스딩의 <주님 당신을 알게 하소서.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겠나이다!>는 고백은 그의 기나긴 방황 끝에 마침내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고 난 이후의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자신에 대한 무지는 곧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지고 그 관계 역시 친밀함보다 소원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모를 때, 길 잃은 양처럼 제멋대로 놀아나게 되겠죠. 조병화 시인의 유명한 단 한 줄짜리 시가 있는데 그 제목이 <넌 누구냐>라는 시입니다. 그 시구는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 나를 공격하는 적의 정체가 알고 보니 나였다는 애기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사제란 자기와 싸울 줄 아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처절한 자신과 싸울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존재가 바로 사제입니다.

그분은 목소리에 익숙하고 민감하게 응답하기 위해서, 그분과 함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 앞에 멈추어 서서, 그분이 누구시며,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죠. 또한 기도 시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다시없이 귀 기울이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바치는 것이며 그로써 참된 자신을 되돌아가는 시간이라고 봅니다. 사제의 참모습 그리고 신자들이 기대하는 사제의 모습은 기도하는 사제입니다. 사제가 무엇을 말하기 이전에, 행하기 이전에 누구와 함께 사느냐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먼저 사제는 주님과 함께하는 존재,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사제의 모습보다 더 하느님 앞에, 하느님과 살아가는 모습은 없다고 봅니다. 예전 제가 사목하던 표선성당은 아침 미사가 5시 30분이었는데, 그 미사 시간은 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본당 신자들이 결정했습니다. 아침 미사 후 일터에 나가야 하기에 아주 이른 시간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신자들이 오기 전 성당에 미사를 준비해 놓고, 말없이 감실 앞에 기도하는 사제의 모습을 본 신자들은 어떤 느낌과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본당 사제의 기도 생활과 사목 활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기도 생활이 곧 사목활동이며, 이는 바로 참 목자의 모습입니다. 이보다 더 큰 성무 활동이 있겠습니까? 사실 제 동창 신부들의 경험을 듣고, 함께 사제관에 머물면서 볼 때 참으로 혼자 기도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참으로 복된 사제였습니다. 함께 기도할 형제가 있었기에.... 기도를 통해서 체험한 바가 사랑으로 발산되고 표출된다고 봅니다. 주님은 먼저 사제인 나의 목자입니다. 매 순간 저희를 기르시는 목자이십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저를 보살피시는 목자이십니다. 언제나 목자이신 주님께 머물 때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제는 양들의 목자입니다. 사제인 나는 목자로서 얼마나 양들을 잘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목자로 새로운 임지에 도착할 때, 본당의 성향과 구성원인 양들의 상태나 바램을 먼저 파악하기보다 자신이 생각해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한번 깊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일지라도 너무 빠른 변화와 접근은 자칫 불화와 불목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습니다. 최소한 6개월 정도 관망하면서 <이 공동체 구성원인 신자들이 참으로 목자인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양들인 신자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신자 가정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신자들의 의견, 그들의 생각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들어 주면서 먼저 양들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본당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본당도 같거니 하고 미리 단정하지 마시고, 계획하신 일을 추진하기 전에 관망하고 경청하는 시간을 갖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쉬울 것 없어라>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을, 부족하거나 아쉬울 것 없이 다 채워 주시고 마련해 주시고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와같이 양 떼인 신자들의 입장에서, 본당 신부님이 먼저 우리를 보살피고 돌보심에 만족할 때, 신부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동조하고 협조할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결코 실망시키지 않고 보답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신자는 목자를 떠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고 곁에 머물 것입니다.

 

2. <2절: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 주시고,> 양들은 생리적으로 4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줄 때 편히 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1) 양들은 소심하고 겁이 많아 쉽게 도망칩니다. 그런 양을 돌보는 목자인 사제는 본디 함께 사는 존재라기보다 혼자 살아가는 존재이며 사실 혼자(=독신자) 살아갑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사람치고 고집 세지 않은 사람, 성깔 없는 사람 없듯이 사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사실 섬기고 베푸는 존재로 살기 원했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대우만 받고 살아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를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 <높임을 받기보다 낮아지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려고 다짐했었는데, 어느 순간 대우받고 살다 보니 그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계획이나 지시한 대로 되지 않으면, 잘 삐지고 토라지고 성질부리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런 목자를 만나면 처음에는 주춤거리다가 반복되면 양들은 소심하고 겁이 많아 도망칩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무심코 던진 돌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은 생명력과 힘이 있는데, 그 차이는 바로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충격의 강도가 다릅니다. 본당 신부의 말 한마디는 신자를 일어나게도 하고 쓰러 넘어뜨리게도 합니다. 사제의 말 한마디가 신자에게 상처를 주고, 그 말로 인해 쉽게 도망치게 하고 냉담의 빌미를 주기도 합니다. 제가 본당신부로 살 때, 여러 사람 앞에서 술 문제가 있는 형제에게 한 질책이 화근이 되어 종내 냉담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술 중독에 걸린 분들의 일반적인 성향은 마음이 여리고 약합니다. 그 형제 역시 모든 면에서 착해빠졌는데, 저의 독한 말로 인해 레지오 교본을 태워버리고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자식 이기는 법 없다고 하듯이, 신자 이기는 신부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마음 돌리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제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달랠 수 없으면 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부님들 아시지요. 왜 신자들이 나를 피하고 도망치는지요? 한 마디로 상처를 받았으니까 멀리하겠지요.

 

2) 양 떼 내부에 있는 긴장과 적대 의식 그리고 잔인한 경쟁에서 구해주어야 합니다. 에제키엘 34,20-22에 의하면 <나 이제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너희가 약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밀쳐 내어 밖으로 흩어 버렸으니, 내가 내 양 떼를 구하여 그것들이 더 이상 약탈당하지 않게 하겠다. 내가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모인 곳이 다 그렇지만, 특별히 본당엔 보이지 않은 적대 의식과 긴장, 경쟁과 암투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혹여 신자들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제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면 더 심각한 문제를 촉발하게 합니다. 예전 저희 어머니는 본당 신부님에 대해 제게 뒷담화를 하셨습니다. 젊은 여성으로 구성된 쁘레시디움에는 영적 담화도 매주 해주시고 마침 강복도 곧잘 해주시는데, 언제부턴가 노인 쁘레시디움에는 오지도 않으시고 강복도 해주지도 않는다고 말입니다. 주임 신부의 생일이나 축일에는 일부 신자들과만 축하 파티나 식사를 한다면, 이런 행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일로 양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긴장하게 되고, 불만이 쌓여가며,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목자는 원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편애! 이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사목활동을 위해,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본당 총회장과 사목위원을 중심으로 해야겠지만, 잔치 때는 그래서는 아니 된다고 봅니다. 가능하면 약자에게 우선적으로 기회를 주는 게 훨씬 보기도 좋고 평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선택한 방법처럼 축일이나 생일을 맞아서 도망치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교구장 주교님에게 야단 아닌 야단을 맞겠죠. 주교님 말씀, <아오스딩 신부가 그렇게 하면 신자들을 욕보이는 거예요!>

 

3) 양들은 해충들로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사목했던 표선성당의 사제관 주변은 감귤밭으로 둘러있었습니다. 비가 온 뒤엔 농약을 살포하는데 거의 1년에 20차례 이상 농약을 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주변에 있던 해충들이 농약을 치지 않은 본당 구역으로 몰려듭니다. 이처럼 교회 안으로 유해한 세속적인 사고와 의식이 몰려듭니다. 어렵고 힘든 일, 예상하지 않은 시련이 닥치면 신자들은 다 도망치고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세례 과정에서 죽음의 체험, 곧 비우고 낮아지고 죽을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교회 밖이나 안이나 별반 차이가 없고, 때론 신자들이 더 인간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이를 방제하기 위한 구제약인 미사나 살충제인 고백성사로 잘 씻어주어야 합니다. 영적 면담과 가정 방문을 자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개신교의 가장 큰 장점은 심방에 있다고 봅니다. 사제가 한 번 가정을 방문하고 가족들과 대화하고 함께 기도한 가정은 외부에서 날아들어 온 해충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미사의 강론도 열심히 준비하고 언제나 고백성사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희 수도회의 성인이 되신 챨스 호번은 본디 네델란드 분이셨지만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활동하셨는데 사실 영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비안네 성인처럼 고백성사를 통해서 수많은 상처 입은 영혼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고백성사는 영혼들의 살충제이고 미사는 구제약과 같습니다. 미사를 정성껏 집전하고 고백성사를 잘 주는 사제가 사목하는 본당은 외부의 해충을 잘 방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4) 양들이 편히 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푸른 풀밭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본당을 양 떼가 좋아하는 초지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됩니다. 부임하자마자 건물 구조를 변경하고 신축하려고 준비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게 좋은 초지草地를 조성하는 일입니다. 좋은 초지를 조성한 후 신자가 증가하면 그때 개축을 하든, 신축하든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예비자들을 잘 돌보는 것도 초지 조성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입교식을 주일 본미사 중에 하고, 환영식과 환대를 거창하게 해준다면 결코 중도에 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환영과 환대는 깊은 소속감을 심어주고, 인도한 신자 역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예비자를 잘 돌보아 줄 것입니다. 또한 미사 후에 성당 입구에 신부가 신자들의 손을 잡아주던지(*코로나로 비대면과 신체 접촉은 어렵겠죠), 등을 두드려주던지, 이름을 불러 주면서 인사를 나누던지 그 사람에게 적합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저는 사목 경험은 없었지만, 이런 것이 본당 사목할 때 제가 했던 몸짓입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과의 접촉이 필요하며 이런 환경을 조성할 때 신자들은 본당에 올 때마다 편안함과 소속감을 느낄 겁니다. 미사에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도통 관심이 없고 눈길 한번 받지 못하면, 차츰 소속감을 잃게 되고 냉담하게 됩니다. 여기다가 사제가 강론을 잘 준비하고 잘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물론 강론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고 강론 내용이 진정성 내지 진솔성이 담겨 있다는 것이며, 가능한 복음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 알지 못한 본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할 때 느끼는 점은, 미사가 참 재미도 없고, 강론이 마음에 와닿지 않더라고요. 그러니 고개 숙이고 주보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지요!

 

3. <3절: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모든 식물이나 동물에게 절대적으로 물은 필요하며, 풍부하고 깨끗하며 더더욱 좋겠죠. 예전 사랑의 선교회 미사를 갔을 때 인상적인 것은 <목마르다.!>는 성서 말씀이 성당에 크게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과도 같습니다. 목마름, 우리는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목마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영혼이, 양 떼가 해갈을 위해 사방팔방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다 자칫 오염된 물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아 2, 13에 보면,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목마름은 누구나 살다 보면 느끼는 생명과 사랑의 갈증이며(요한 4장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는 자연스러운 상황입니다. 다만 이를 해갈하기 위해서 어떻게 어디서 해소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교구의 사제 두 분이 사제직을 떠났는데,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재미없어서 사제생활을 그만 두렵니다.>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기보다 세상적인 것으로 채우려 하고 시선을 돌린다고 목마름은 해갈되지 않습니다. 샘물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면에 우물이 있습니다. 흔히 미사보다도 출석을 강조하는 레지오 마리에, 그 출석율의 비결은 다름 아닌 이차 주회 곧 모임보다 酒會에 있지 않나요. 일시적으론 해갈은 되겠지만 영구적이거나 영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파나 개신교로 개종하는 대다수가 성당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제가 맨 처음 영세를 주었던 부부는 본디 가톨릭 세례를 받기 전에 순복음 교회 신자였었는데 얼마 후에 보니 순복음 교회로 다시 넘어갔더군요. 그 자매의 표현에 의하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주된 요인은 본당 사제의 강론에 만족하지 못해서라고 하더군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4. <3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양 떼를 인솔하다 보면 뒤집힌 양, 나둥그러진 양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이유로 양을 잃거나 죽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루가 15장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에서 주님께서 길 잃은 양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양들이 무리에서 떨어지게 하는 어둠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점에서 유다 역시도 예수님의 시선에선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유다만이 아니라 사제인 우리도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길 잃은 양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길 잃은 양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금기를 벗어난 사람만이 금기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고, 금기를 벗어 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깊은 뜻을 헤아려서 <잃어버린 양 찾기 운동>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목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사제가 치유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한다는 표현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유다를 찾아 나섰으며, 심지어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유다는 예수님의 너그러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주님께 <입을 맟췄습니다.> 이처럼 아무런 결실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제는 몇 번이고 찾아가고 또 찾아가서 돌보고 보살펴야 합니다. 냉담의 원인이 자기 탓이든 다른 요인이든 찾아가는 게 복음의 실천이며, 이럴 때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생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고, 그때 생기를 되찾을 겁니다.

 

생기를 되찾아 주어야 하는 까닭은, 1) 양들은 우묵하고 편안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본디 양들은 편안함을 좋아하고 게을러서 쉽게 안주하려고 하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이 정도면 되었지’ 하고, 현상 유지와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2) 양털의 무게로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털은 그리스도인의 옛 삶과 낡은 삶으로 말미암은 오물이며 이 오물이 여러 가지 다른 이기심과 교만함, 독선과 위선과 뒤섞이다 보면 그 무게로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양의 털을 깎아 주어야 합니다. 물론 양들은 깎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변화를 무척 싫어합니다. 깎고 나면 가볍고 좀 더 자유롭고 편한데 말입니다. 3) 살이 너무 쪄 뚱뚱해져 쉽게 걸려 넘어집니다. 가정이나 사업이 잘되어갈 때, 자신감과 자만심으로 넘치게 되고 눈에 뵈는 게 없어집니다. <배부른 김에 주님이 다 뭐냐>라고 (잠언 30, 9) 허풍을 떱니다. 사실 삶의 여정은 오를 때가 있으면 내려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높이 오르면 가장 깊이 내려가야 합니다. 이를 망각하고, <다 잘 되어 가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그때가 바로 문제입니다.

5. <3절: 주님께서 당신 이름 그 영광을 위하여,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양들은 습관이 강해서 늘 같은 길로만 다니고, 같은 장소에서만 풀을 뜯게 됩니다. 그러기에 초지가 엉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곧 목자가 보살피지 않고 방치한 탓이기도 합니다. 양들을 위한 초지 조성을 위해서나 양들의 안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목자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예방조치가 필요합니다. 사실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지만 변화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변화하기 어려운데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어리석음을 사제인 저희도 자주 범합니다. 사실 변화는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변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목자인 사제가 먼저 변하면 본당은 변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해야 한다고 소리만 지르면 오히려 불신을 조장하는 처신입니다. 더욱 목자가 자신의 잘못된 습관과 버릇을 고치기보다는 변명과 합리화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최악은 없습니다. 다시금 강조합니다. 사제가 변하면 본당이 변합니다.

 

6. <4절: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실제로 양 떼는 여름에 산의 풀밭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항상 골짜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길이 그곳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풀밭으로 향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시간이자 자리입니다. 영국의 여성 신비가 놀리치의 쥴리아는 늘 상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한 빈첸시오 성인께서도 <모든 문제를 하느님께 맡깁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돌보시리라는 것을 기억합시다.>고 하셨지요. 그러기에 시편 22장의 은총이란 우리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더라도, 우리가 어느 때 어디에 있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목자이시기에, 힘듦과 어려움 순간에 멀리 계시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정원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 한가운데 무거운 돌이 있어서 딸이 그 돌을 옮기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워서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빠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애야, 나는 처음부터 네 옆에 있었는데도 넌 나에게 한번도 ‘아빠 힘들어요, 도와 주세요.’라고 하지 않는구나!> 삶의 어려운 순간, 신자들이 사제를 향해 <신부님 너무 힘들어요. 좀 도와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한 보람과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골짜기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삶에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을 겪기 마련이지만 신앙인에게는 고난 속에서도 부활을 관상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4,8~9)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사실 인생의 골짜기를, 어둔 밤을 지난 본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론 머리로만 살아가는 사제보다 자신이 직접 고통을 겪은 무당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위로를 더 줄 수 있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관건은 어둠의 골짜기를 통과해 보았든 통과해 보지 않았든, 목자는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커다란 힘이 되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7. <4절: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목자는 양 떼를 거느리고 높은 산 정상으로 나갈 때 최소한의 장비가 필요한데 그 장비가 바로 지팡이와 막대입니다. 막대기는 다양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는데 징계할 때, 검사하고 숫자를 헤아릴 때, 보호가 필요할 때 이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아울러 이 막대는 바로 목자의 권위, 곧 사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며, 이 권한은 다름 아닌 사제의 고유한 직무와 소임입니다. 작금의 현실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 심각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차 권위 상실은 심각해질 겁니다. 한국 교회, 성직자에 대한 존경은 여전하지만, 사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그렇게 멀지 않다고 봅니다. 예전과 달리 사제가 신자들에 대한 태도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전 어느 본당에 특강을 하러 갔었습니다. 비가 오는 관계로 조금 이른 시간에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미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성당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젊은 본당신부가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신자들을 애 다루듯 야단을 치고 호통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듣고 있는 제가 더 불편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특강을 하기 위해 제대에서 제 앞에 앉아 계신 신자분들의 얼굴을 보면서 더 놀랬습니다. 거의 대부분 신자는 저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하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젊은 사제를 보면 느끼는 점이 많았습니다. 때론 큰 소리도 내야겠지만, 이제 세상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며, 그만큼 사제의 언어 구사나 표현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당시 군중들이 놀랐던 것은 다른 지도자에 비해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권위란 직책이나 신분, 소임, 연령 등에서 파생하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예수님의 삶, 언행일치에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직책과 지위에 상응하는 행동과 삶이 수반할 때 권위는 지속되고 힘을 갖게 됩니다. 결국 사제가 사제답게 살아갈 때, 목자가 목자답게 자신의 직무와 소임에 충실할 때 권위는 힘을 갖게 됩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혼자 사는지 알아!>라고 외치지 않아도 목자다운 직무와 소임에 충실할 때, 삶으로 살아갈 때, 신자들은 사제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권위는 힘이 있고 값진 것입니다. 결국 사제의 권위란 힘이나 특권에서 아니라 섬김과 봉사에서,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함으로, 말로써 행동하심이 아니라 행동함으로 말씀하시는데 있습니다. 성인이 성인을 낳는다는 표현처럼 사제가 사제답게 살 때 거룩하고 훌륭한 신자들이 생겨납니다.

 

8. <5절: 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기름, 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 여름에 조성된 높은 초지를 표현할 때 영어로는 table상床 (*지난 2017년 안식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가서 ‘테이블 마운틴’을 다녀온 이유도 시편의 이 구절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라 표현합니다. 산의 정상에 있는 초지는 양들이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휴식처이며, 목자는 이 초치를 준비하기 위해 독초나 독버섯 등을 뽑아주어야 합니다. 사실 호기심 많은 양에게는 위험한 것일수록 겉보기 아름답고 탐스럽게 보이는 법입니다. 아울러 맹수들이 끊임없이 양들을 공격하기 위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들에게 여러 유혹자와 어둠의 세력이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주된 소임은 독초나 독버섯을 뽑아내고 양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목자의 자기희생이 요구됩니다. 이 일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치하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한 여름은 풀들이 잘 자라고 이에 따라 파리떼가 극성을 피웁니다. 그래서 때론 양의 코에 알을 낳기에 이를 막기 위해 방충제 기름을 발라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들은 파리로 인해 성가심과 괴롭힘을 당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울러 한 여름은 옴병철이기도 합니다. 옴병은 접촉을 통해서 전염하게 되는데, 양들은 서로 머리를 비벼대는 습관이 있고 이런 몸짓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유황과 올리브기름을 양들의 머리에 발라 주어야 합니다. 기름을 발라주지 않으면 병들고 더럽게 되기에 적절한 때에 기름을 잘 발라 주는 게 목자가 할 일입니다. 양들에게 파리와 옴병이 엄습하듯이, 교회 신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은 자리다툼을 향한 비교와 경쟁, 미움과 적대 의식이 생겨날 수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치유책을 늘 모색해야 합니다. 주님은 비록 파리와 옴병들로 시달림을 당한 나의 삶의 상태를 알고 기름을 발라주시고, 온갖 은혜로 충만한 술잔을 주시는 것처럼, 목자인 사제 역시 이런 보호와 돌봄은 신자들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9. <5절: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살으오리다.> 목자의 부지런한 수고와 노력은 양의 안녕과 복지에 필수적입니다. 착한 목자가 양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과 초지를 조성하고 돌보아 주심이, 그리고 모든 외부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것은 양들에게는 큰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왜 신자들은 사제 인사이동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까? 그것은 양들에게 있어서 어떤 목자가 부임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영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전 L.A 교구의 한인 본당 피정을 다닐 때, 당시 교구장님께서 사제들에게 이런 표현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1명의 사제를 위해서 몇 백명, 몇 천명의 신자가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1명의 사제가 몇 백명의 신자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교구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사제에게 있어서 사목할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 곧 자신의 사랑을 필요한 신자들이 있고, 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제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사20,28)

 

제 나눔을 마치면서,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캐서린’이란 분이 <친애하는 신부님들께: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참조>란 글을 인용하렵니다. 이는 그녀의 사제를 향한 애정어린 바람이자 모든 신자의 바람이라고 생각해서 신부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저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안내해 주기 위하여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왜 여러분이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분노에 차 있어야 합니까? 왜 다른 목장으로 눈길을 돌리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어야 할 바로 그것, 곧 우리의 친구이며 스승, 치유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 곧 또 한 분의 예수님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신원에 대한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족할 것이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닌 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을 더 이상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길잡이를 찾고 있는 혼란에 빠진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침기도를 대신해서 성가 <300번 사제의 마음>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사제의 맘은 예수맘 우리를 애써 돌보시며 어디서나 길 잃은 양 주님께 인도해 주시네 오 착한 목자 예수여 네 사제를 축복하사 거룩하게 하시옵고 네 사제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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