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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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저는 참 어리석은 바보처럼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인정받지 못한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존재로 저는 살아왔습니다. 다들 자기 살기 급급해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수도회에 입회하기까지 타인의 시선 곧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생각하느냐에 참으로 민감했습니다. 제 가족들이나 가까운 사람들 모두가 겉으로 드러난 제 모습이나 행동만을 보고 <난 널 잘 알아!>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표현하지 않았겠지만, 어떤 면에서 사실 저를 잘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영세받은 후 6개월 만에 제가 피정 센터(=광주 화정동 수도원)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이젠 돌아가신 박 도세 신부님과 첫 만남의 순간, 그분은 제게 <넌 잘할 수 있을꺼야!>라고 저를 인정해 주고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가족은 제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신부님은 지금껏 제가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가족들과 달리 저의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기에 이 길이 어떤 길이며 어떤 삶인지 알지 못했지만 저는 기꺼이 용기를 내어 이 길과 이 삶을 선택했습니다. 사랑은 타인을 자신의 평가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박 신부님의 사랑의 인정과 격려가 저를 하느님의 지혜로운 바보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Mr6,1~6)는 예수님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인듯 보이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과 거부를 처절하게 겪은 내용입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행적을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의 복잡한 속내는 예수님을 향해 <놀라워하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겼다.>(Mr6,2.3)는 말에 함축含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움>은 기대하지 않던 일을 겪게 될 때 느끼는 감정이며 놀라움의 정도가 지나치면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향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놀라고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복음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6,2)라는 자문自問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풍겨 나오는 지혜와 기적의 힘에 놀란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집1,1)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단지 놀라워 한 겁니다. 그렇지만 이 놀라움은 그들 내부에 있는 어둠의 무지가 작동하면서 그를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존재로 하향 조정하고 평가하면서 한순간이나마 자위自慰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라고 표현한 이면엔 그들은 아직도 예수에 관해서 <알고 있다.>고 선입견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착각에 빠졌기에 자신들이 그곳 회당에서 듣고 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앎보다 모름을 받아들일 때 참으로 알게 되는데, 그들은 알고 있다는 완고한 확신이 도리어 참혹한 불신을 낳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속내가 드러난 것은 바로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못마땅하게’ 여긴 까닭은 바로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지 않아 마음이 몹시 불쾌하고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분의 언행의 모든 것이 그들 내면의 숨어 있던 열등감 내지 약한 자존감을 건드렸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무지와 어둠을 통찰하기보다 그것을 예수님께 전가하고 탓을 돌린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거나 일하다 보면 못마땅할 때가 없지 않아 많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그런 느낌을 자극한 외부에 시선을 돌리기보다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할 때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인정하고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을 믿었다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그러하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완고하고 고집스런 선택의 결과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에서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 만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2,4~5)고 하신 말씀으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런 고향 사람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고 응대應對하십니다. 이런 일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인간 공통의 문제인가 봅니다.

불교 선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신 마조 선사가 계십니다. 오래도록 도를 닦던 그가 득도得道하고 난 뒤, 잠시 고향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그를 보고,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라도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 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고향의 할머니는 세월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졌는데도 어린 시절의 꼬마로만 여긴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조는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답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선의 황금 시대’ 중에서) 이것이 인간의 깊은 죄의 습성이며 악한 마음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을 듣고 보면서 그들은 분명 놀라면서도 안으로는 편견과 선입견, 불신과 거부로 가득 찬 고향 사람들의 못마땅함에 대한 예수님의 통렬한 일갈一喝이 바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런 고향 사람들의 환대와 적대, 놀람과 거부는 이후에 예수님을 향한 세상의 반응으로 십자가의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질 겁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 자리가 어디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늘 상 사람들로부터 환대와 환영만을 받는다면, 우리 존재와 삶을 다시금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 시기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Lk2,34)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삶 또한 세상의 반대받는 표징이 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 고집은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쩌면 이런 고집스런 마음이 아닌 빈손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한 신뢰와 의탁의 삶을 사셨던 리지외 성녀 소화 데레사는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고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자만하지 않고,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온전히 드러난다.>(2코12,7.9)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앎을 모르는 우리가 아니라 모름을 아는 우리가 되려면 자신의 무지와 완고하고 우상과 같은 고집스런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에게 머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우리의 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12코9참조) 그럴 때 참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되고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종이 제 안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시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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