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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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김수환 추기경께서 <기도의 체험>(안토니 블룸) 서문에 쓰신 말씀을 잠시 낭독할까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기도하는 교회인가? 한국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인가?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라고 생각하는 이가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될까? 한국 교회가 생기를 잃고, 침체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나날이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어떻게 기도할 줄도 모르거니와 기도가 얼마나 필요 불가결하고 중요한지 조차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데에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추기경의 말씀에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 까닭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신앙 환경과 여건이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언급은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교회의 활력과 생기 회복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와 농촌 간에 그리고 아파트 밀집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교적상의 25% 정도만이 주일미사 참례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새 영세자 증가율이 둔화 내지 감소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냉담 교우와 행불자 숫자가 더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냉담자나 행불자 가운데 일부 신자들이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신천지와 같은 교단에 빠져드는 것은 물론 사이비 영성 단체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명상법에 따라 수련하고 나서 <나는 마침내 참된 진리와 행복을 찾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현실입니다.

 

교회 안에 생명력과 활력이 감소하면서, 우리 밖의 다른 초장草場을 기웃거리는 신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마음이 분산된 분들에게는 남의 초장이 더 기름져 보이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양 우리(=교회) 보다 이웃의 초지를 기웃거리며, 다른 목장에 있는 초지에서 풀을 뜯어 먹거나 우물에 가서 마실 물을 찾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앙체험의 결핍, 참다운 기도 체험이 없어 내적으로 기쁨과 만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며. 교회에서 활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은 예전과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는 아닙니다. 사람은 육적인 면과 아울러 영적인 면이 충족되고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아무리 육적으로 예전보다 잘 먹고, 잘 살며 다른 취미 활동이나 운동을 즐길 수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우리 교회 내에는 신자들의 영적인 갈망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기도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가톨릭교회는 그 긴 역사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성인 성녀와 영성가로 넘쳐납니다. 이분들은 전례와 하느님 말씀, 개인 기도를 통해서 마르지 않는 샘으로부터 물을 길어 마셨으며, 우리 또한 그분들처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껏 기도의 필요성과 의무에 대해서만 강조했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소수의 열심한 평신도만이 우리 교회의 영적 유산인 기도를 배워보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고만 가르쳤지, 물고기를 어떻게 잡을 수 있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루이 에블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모른다. 기도는 잃어버린 예술이다. 기도를 가르쳐 주는 선생들은 없고 학교도 없다. 일요일, 당신은 기도를 배우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실제로 기도하고, 기도의 날개를 펴는 그런 교회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그런 교회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아주 적게 기도하고 보기 드물게 기도하며 또 보잘것 없이 기도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몇 년 전부터 교회 안에서 다양한 <기도 수련 방법>이 소개되고 있고 배우려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소개되고 있는 기도 방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교회의 영적 창고 안에 오랫동안 보관되어왔었습니다. 단지 그런 수련 방법에 관해 별반 관심도 없었고,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관심을 쏟고 실천하려고 했기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새로운 오순절 시기를 맞아, 성령께서 교회 안에 묵혀 두었던 영적 유산을 모아 둔 영적 창고에서 <기도 수련 방법의 보화>들을 끄집어내어, 묻어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많은 사람이 편리하고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활기와 생기를 쏟아부으시며 기도 학교로 이끌어 주십니다. 모든 수도회는 저마다 기도학교입니다. 모든 기도학교에서는 이런 교회의 전통적인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과 더불어 직접 수련함으로써 기도를 배우려고 합니다. 기도를 배운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배우는 것이 유익합니다. 서로는 서로를 위한 좋은 기도의 스승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이 열망이 더 깊은 기도로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생활화된 기도의 실천자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Hans Guadamer는 <의문어는 대상이 되는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기 마련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의 본질적인 의문은 우리네 심층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처럼, 기도 생활의 측면에서 <기도는 내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내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살아오면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심층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쳐 올라오는 질문, 특히 기도에 관한 질문들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기도는 언제 어디서 할 수 있는가? 기도는 왜 하는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 각자의 고유하고 유일한 기도 생활의 습득을 위해, 우리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각자 깊이 있게 숙고하면서, 자신이 실천해 왔던 기도 생활이나 방법을 바탕으로 해서 답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본질적이고 실존적 질문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부터 일어나며, 살아있는 질문은 질문에서 얼마간 거리를 두고 홀로 머물면서 바라볼 때 점차 드러납니다. 그때 의문어는 대상이 되는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첫 번째 강의 주제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혹 하느님에 관해서 말하려고 할 때, 앎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에서 출발하는 게 더 쉽고 편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 발목을 잡을 수 있기에, 그리고 우리가 만든 神像을 일단 내려놓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관해서 혹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파라독스 곧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이중적 존재 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은 현존 가운데 부재하시고, 부재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고, 이것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십니다. 이는 마치 종이의 <앞뒤> 면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설의 핵심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이런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動과 不動, 영원과 시간, 우연과 필연, 은총과 자유, 빛과 어둠, 텅 빔과 충만. 이렇게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 넘어 계시고 세계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초월하신 분이시고 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1디모테오 6, 16에서 <하느님은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저자는 이런 하느님을 향해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게 하여 주소서. >라고 밖에 기도할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대로 초월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이성으로 그분에게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볼 수 없는 빛 속에 계신 아빠 하느님을 당신 존재로 보여 주시는 분이심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면서 말씀하시고 활동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 아오스딩은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시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4,6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이처럼 초월과 내재 사이에는 중간 범주가 하나가 있으니 이를 투명transparency이라고 표현합니다. 투명의 존재 방식은 양자 곧 초월과 내재를 배제하지 않고 내포하고 함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투명은 내재와 초월의 현존을 아우릅니다. 이를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비는 정확하게도 우주 안에서의 신의 발현에 있지 않고 우주 안에서의 신의 투명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님은 <드러내어 나타남 Epiphany만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은 나타남 Diaphany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체험은 결국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셨으며 그분이 바로 나자렛 예수이십니다. 나자렛 예수 안에서 우리가 만난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강생이며 육화이고 공현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절대적인 질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6) 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물론 예수님을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든 문제는, 근본적인 진리이며 사랑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복음을 통해서 되찾고 되살려야 합니다. 복음은 여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당신 자신의 현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가르치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통해 삶의 희망과 긍정을 살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인간과 함께 하시면서, 인간을 너그럽게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이유 곧 세상에 파견된 목적과 이유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순간은 바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에 집약되어 있습니다.(루가 4, 16~30)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란, 묶인 자들을 해방하고, 눈먼 자들 눈뜨게 하시며, 그리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베푸시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신 아버지의 일입니다. 아빠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니 말하고, 일하시니 일하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일이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구원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거부와 배척을 받으신 까닭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신상에 고착되고 화석화된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실패한 삶과 사도직은 나자렛 고향 사람들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고 예견되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삶과 사도직은 실패한 듯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거부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리석고 바보스런 십자가 길과 고난의 삶을 통해서도 묵묵히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하느님의 뜻인 세상의 구원을 위해 충실히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실천하셨습니다. (*마태오 13장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밀과 가리지의 비유’에 숨겨있는 뜻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존재와 삶 곧 파스카의 삶을 통해서 이루신 일을 사도 요한은 1요한 1, 3~7을 통해 친교(=하나됨)로 집약합니다. 그런데 친교는 예수님의 삶의 이중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가는 가장 바람직하고 올바른 길은 사랑의 삶과 기도 생활을 통한 길입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사람에게로 향한다면 기도는 내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로, 사랑이 날숨이라면 기도는 들숨이며 이렇게 기도와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유일한 경로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된다>고 강조하였는데, 바로 그리스도가 되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하느님과 깊은 기도 생활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기도와 사랑의 조화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까? 굳이 답변하자면 내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그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야말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분이셨지만 자주 홀로 외딴 곳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러기에 예수의 인격과 그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되심으로서 인간을 하느님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고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파트너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친교를 통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기도에 참여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를 아버지께 이끄십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 당대의 다른 그룹과 비교해 볼 때 근본적인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찬양 기도를 촉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강조한 경우는 바로, <여러분은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마태 5,44), <이런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오.>(마르13,18),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오.>(루가 22,40)라는 경우이며 상황입니다.

 

이처럼 특정한 역경에 직면하여 제자들에게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처지에 닥치면 우리는 정말 하느님은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나 할까라며 의심하고 의혹을 갖습니다. 바로 그런 때야말로 자기 자녀들을 희생하고 싶지 않으신 하늘에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의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7,7~11)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기도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악의 권세에 이길 수 없기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의지하고 의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존재도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8,28) 아울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청원 기도를 바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다만 청원 기도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며, 우리의 청원 기도가 그저 크거나 작거나 무슨 기적을 빌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사생활에서 보호를 받으려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처지에 이르려고, 우리의 삶 가운데 무슨 경이를 일으키도록 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빌 수 있고 빌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와 우리의 이웃 안에서 모든 이의 구원으로 작용하기를, 우리와 우리 이웃에게 쓰라림 없이 감당해 낼 힘을 주시기를, 모든 곤경과 위험 속에 함께 계셔 주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빌 수 있고 빌어야 하는 것은 필경 <주님의 기도>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올바른 기도를 터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우게 되며, 이런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을 알고 그것을 살게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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