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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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 문뜩 소중한 어떤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들음과 생각함>입니다. 그 결과 우리네 삶은 외적으로 풍부하고 풍요롭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나 영적으로 텅 비워 졌고 메말라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오르는 의문을 듣고 물어야 합니다. 자주 인용하지만,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002년 저희 수도회 관구 승격식 전에, 광주 명상의 집에서 예수고난회 세계 관구장 회의(시노드)를 하던 중 잠시 송광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시노드의 주된 안건이 양성이었기 때문에, 불교에서 스님의 양성과정을 듣고 싶었던 겁니다. 그때 저희 일행을 안내하고 담당하신 분은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 스님이셨습니다. 그때 그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불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자아 상실의 시대에서 <나는 누구인가?>야말로 이 시대가 되찾아야 할 화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스님의 일갈을 듣고 저희 일행 중 포르투칼에서 오신 신부님이 다음과 같이 응수하셨습니다. 가톨릭의 오랜 영성 전통은 끊임없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 왔다고 말입니다. 그때 제게 다가온 생각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본질과 실체>의 다름이 아니라 같음의 다른 시선이요 접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 아오스딩이 자신의 오랜 방황 체험을 통해서 <주님,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소서, 그러므로 제가 누구인지 알겠나이다.> 라고 고백했던 말이 지극히 지당하고 적절한 표현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앎이 곧 자신에 대한 앎이며, 자신에 대한 앎은 곧 하느님에 대한 앎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인격적 앎이며 사랑의 앎임을 전제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향해 던진 질문, <너는 어디에 있느냐? Ayeka?>의 바탕에는 하느님 앞에 서 있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러시아 시인은 이를 이렇게 노래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거나 돌아설 수 있지만,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그렇지 않나요. 자신이 누구임을 아는 것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자 원천인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인간 자신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곧 자기 자신의 이해이며, 자기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성인 성녀들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religion/re-ligare;’다시 아는 것‘,’다시 하나가 되는 것‘,;다시 선택하는 것’) 생활의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서 출발하고 도착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참된 자기와 만남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분주하게 만들려는 유혹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는, 많은 사람의 문제는 자신의 영혼을 마주 대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회피하고 외면하려는데 있습니다. 참된 자기 이해의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나 멈추어 서서 들여다보면 됩니다. 직시와 직면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

영성 생활의 수행과 실천은 이 자기 인식과 자기 이해의 과정을 탐구하고 추구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입니다. 일상의 반복으로 분산된 마음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마음의 정향征向을 통해 <우리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일깨워 줄 수 있을 때만 도움이 되고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되면 하느님 아닌 어떤 것을 다루고 있더라도, 곧 세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결국엔 하느님의 신비를 보다 더 가까이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일이 곧 기도이며, 기도가 일이 됩니다. 日常卽道, 하는 모든 일이 단순히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일, 聖務가 됩니다. <주의 깊게 들고 봄>을 통해 자신을 초월함과 동시에 보다 더 현실에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정원에서 딸과 아빠가 함께 정원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빠가 딸에게 정원 한가운데 있는 큰 돌을 발견하고는 딸에게 “무거운 돌을 치우도록 하렴아!” 그러자 딸애는 온 힘을 다해 그 돌을 치우려고 했지만,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를 보고 있던 아빠가 딸에게 “애야, 너는 아빠가 옆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구나.” 우리 역시도 이 딸처럼, 함께 계시고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간청하지 않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 하느님께 간청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다 아시지만, ‘아빠, 도와주세요’라고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할 때 더 잘 들어 주신다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란 무엇이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고 한다면 먼저 존재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사랑하는 것 보다 사랑받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활동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활동이 최우선 가치가 될 때 우리는 존재 감각,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는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기도도 두 인격의 관계입니다. 무관한 관계, 독립적 관계가 아닌 하느님 안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철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결국 기도는 우리 존재의 근거,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 살아가고 숨 쉬며 일하는 것입니다. 그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고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싶으나 우리는 그 사랑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나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핑계를 대고 피하고 멀리합니다. 기도 시간이 없다. 혹은 기도가 어렵다는 말의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에 있습니다. 기도의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에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 곧 사랑이신 주님과의 만남이자 대화이며 친교입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무엇인지 묻기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이나 활동을 위해 그리고 사람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루 대부분 시간을 어디에, 무엇에, 누구에게 쏟고 사용합니까? 시간을 누구하고 보내며, 무엇 하는데 보내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표시하는 지표입니다. 기도 시간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비례합니다. 기도하기 어려움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런 마음 상태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개인적인 인격적 관계 체험)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에 그렇습니다. <기도는 다만 하느님의 사랑에 내어 맡기는 것이며, 기도 시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보다는 그분께서 나를 사랑할 시간을,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차적으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은, 본질이 아니고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순례입니다.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로 나아감이며, 나아가 아버지를 만나고, 치유 받고 화해하고 사랑받음을 통해서 사랑이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생명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방문하기 위해 자기 집을 떠나듯이 자기(=자기 삶, 관심사, 문제 걱정, 육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집착 등)에서 타인 곧 하느님을 향해 떠남으로 기도는 시작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기도의 열망이고, 열망이 곧 기도입니다. 이 열망은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상황과 현실의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육체적인 치유, 정신적인 방황과 공허함, 내적 평화, 그리고 초월적인 여러 동기 등등.

루카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상실과 눈뜸과 깨달음(=제 정신이 듦), <자기 중심에서 아버지 중심>으로 인식 전환 체험, <아버지의 존재 확인>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그 해답은, <내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깨달음으로 터득합니다. <존재는 관계 속의 존재>이며 이를 깨달은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자신의 낡은 삶의 태도와 자리를 떠나 걸음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작은 아들과 함께 <인생이란 마치 아버지의 집으로 순례하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자기 마음자리로 나아가는 순례와 같습니다.> 사실 모든 기도하는 영혼에게 있어서 <되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떠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떠남은 귀의를 위한 전제이며, 귀의는 떠남의 귀결입니다. 떠나 온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리와 시간은 기도의 역동성처럼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아버지와의 신뢰 회복과 아버지의 자녀로써 사랑의 회복의 거리이며 시간입니다. 사막의 40년 여정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골수에 새기고 또 새기려 했던 것은,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시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적 여정의 원형입니다.

 

예전,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었습니다. 예정에 없었던 여행인지라 미처 예매하지 못해서 입석표를 구입했기에 서울에서부터 고향 순천까지 내내 서서 가다가 잠깐이지만 앉아 계시는 승객의 팔걸이에 앉다가 하면서 여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불편함이 없지 않았고, 그에 따라 여간 몸도 마음도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마침내 고향이 가까워지자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고향에 나를 기다리시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내가 굳이 이렇게 힘든 여행을 선택했을까? 그렇게 고향이 가까워지면서 그리고 엄마를 만난다는 설레임 속에서 그토록 불편하고 힘들었던 여행이 기다림의 기쁨으로 넘쳐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되돌아갈 고향이 있고, 고향에 나의 귀향을 기다리시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자각처럼 . 이는 곧 아빠 하느님 계신 곳을 향하는 우리네 신앙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우리 여정은 지금 하늘나라를 향해 그리고 그곳에는 우리를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아빠 하느님이 계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삶의 힘듦과 고통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고향의 부모님처럼 하느님께서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시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기쁨으로 충만해질 겁니다. 떠남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떠남을 가로막는 내외적 장애를 떨칠 수 있는 것은 <떠나고자 하는 내적 열망이 강할 때>입니다. 왜 나는 아버지께로 떠나야만 하는가? 그 해답은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일 것입니다. 이 필요는 <‘나는 당신이 필요하기에 사랑합니다’가 아닌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필요합니다’>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어떤 면에서, 귀향길에서 잠시 길가에 쉬는 것과 같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기도는 길을 가다가 잠시 머무는 휴식, 쉼이며 남은 여정을 걷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동안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야 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지 몸만이 기도하는 장소로 떠나는 것,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뜻에서 떠남이고 비움을 말합니다. 어머님 마리아께서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하신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비워 그런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맡김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든 타인을 위해서든 자신의 뜻을 우선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우면 편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물론 어렵겠지만 성령께 의지하고 도우심을 청하면 점점 더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 안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술입니다. 리듬체조 선수가 단지 운동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단련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시간을 내야하고 기도하는 장소로 나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편한 장소가 최적의 장소는 아닙니다. 떠나는 것은 단지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익숙한 곳이 아닌 낯선 곳이 주는 은혜로움은 안주보다 모험을,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웃을 방문하여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다시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올 때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웃을 방문하고 만나고 난 다음, 방문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활력과 여유를, 기쁨과 평화가 샘솟고 그것이 일상의 단조로움을, 가족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난 기도는 기도의 시간과 장소에 국한되고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삶답게 이끌어 줍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기도와 삶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한데 강조점은 기도가 아닌 기도생활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바쁜데 언제 기도할 시간을 찾나, 도대체 기도할 시간이 없다.> 고 말합니다. 삶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구분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제가 본당신부로 생활할 때, 가장 불편한 시간과 장소는 노래방입니다. 성당에서 요조숙녀처럼 처신하다가 노래방에 가면 ‘열애’를 부른 ‘윤시내’처럼 다들 돌변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 노래방입니다. 기도할 때는 열정이 없으면서, 노래방에만 가면 다들 가수로 돌변하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아니 됩니다. 모든 시간, 모든 장소는 다 거룩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란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린 사람이 있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가 어떤 상황에 있거나 관계없이 항상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매 순간, 모든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능력이야말로 기도하는 영혼이 배우고 익혀야 할 능력입니다. <모든 사물 안에서,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정신>이 필요하며, 이것이 가장 중심이 되는 기도의 단련이며 기도 체험입니다. 기도 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심장의 박동처럼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신앙의 눈,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모든 떨기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타오르는 떨기가 될 수 있습니다. (탈출기3, 1~5; 떨기는 모든 실재의 성사성을 의미함)

 

기도 생활이란 곧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사는 법입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자꾸만 하느님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어떻게 보면 하느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시지 못하도록 하고, 하느님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그러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온통 무너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지요? 물론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까지 기도하던 방법이 자신과 전혀 맞지 않은 경우를 만나셨으리라 봅니다. 기도할 수 없는 순간, 이때야말로 성령께서 내 안에서 기도하는 때이며, 기도의 단계를 뛰어넘는 순간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휘두르고 조정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분 앞에 너무나 작은 존재, 보잘것 없는 자신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고 늘 하느님의 은총에 신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순간의 은총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늘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회피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씁니다. 하지만 영성가들은 오히려 기도하기가 어렵고 우리가 내면적인 위로가 없는 그때야말로 우리의 내면적인 힘을 강하게 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메마르고 어려울 때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느님께 올바른 신뢰를 지키는 응답이 어떤 것인가를 분별하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곧 순간의 은총이며 순간의 은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충실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저는 2020년 11월 말 심장 절제 시술, 화상을 입고 피부이식 수술 이후 몸이 너무 힘들어 기도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시술하면서 입은 화상으로 말미암아 병원에서도 그리고 퇴원한 후에 도대체 잠을 잘 수 없었기도 하지만 하느님 앞에 깨어 기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에 집중하거나 잠심할 수 없었기에 그냥 지치고 힘든 제 몸뚱아리를 그냥 하느님 현전 앞에 나서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이처럼 기도할 수 없을 때 몸이라도 하느님 앞에 가져다 놓을 때 빨리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렇게 항구하게 충실하게 기도 시간과 기도 장소에 자신을 이끌 수 있는 것도 기도의 단련, 훈련의 결과입니다.

 

성녀 대 데레사는 기도하는 영혼을 정원사에 비유했습니다. 정원사의 임무는 정원에 물을 주어서 화초가 죽지 않고 잘 자라도록 돌보는 일입니다. 정원사가 화초에 주는 물은 곧 기도이며, 정원에 피어나는 화초는 덕행입니다. 물은 화초를 위한 것이기에 기도는 기도 그 자체보다도 덕(德)을 위한 것임을 망각해서는 올바른 기도 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생활화된 기도라고 할 수 없겠지요. 종종 공동체에서 사람들의 비난 아닌 비난을 듣는 사람을 유심히 잘 살펴보십시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고 기도하지만 ‘생활은 영 아니올시다.’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곧 기도가 덕행을 위한 것임을 지적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정생활이나 수도 생활(=사제생활)에서, 부엌에서 칼을 사용하다가 사용하지 않고 버려두면, 녹슬어 더이상 못쓰게 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게을리하다 보면 하느님과 함께 겸손되이 살아갈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을 향한 헌신과 열정이 식어가고 퇴색되어 버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기도 생활은 성소와 신원을 보존하고 성장하는데 그 어느 것과 대체 불가능한 신자 생활과 수도 생활의 근간이며, 최우선하는 성무 활동이며 으뜸가는 봉사입니다. 사실 기도 생활의 충실과 불충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활력과 타락의 기준점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고 했습니다. 호흡과도 같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를 숨 쉬듯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알퐁소 리구리오 성인께서는 어느 날 신도들에게 “기도하지 않은 것은 죄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퐁소 성인은 <우리는 성사없이 구원받을 수 있지만 기도함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사를 통해서 생명을 받았지만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 생명(=자녀성)을 보존하거나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하지 않은 영혼은 병든 영혼이다.>는 표현에 경험적으로 공감합니다.

루카복음 22,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라는 표현은 곧 예수님에게서 기도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도가 필요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홀로 외딴 곳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서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분의 삶에서 기도는 곧 생활이었고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였습니다. 그분에게 기도는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라 恒常的인, 일상적인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셨고, 그만큼 기도는 그분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습니다. 몸에 밴 행위였습니다. 타인을 의식하여 보여 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의식 있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무의식적으로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 생활의 본보기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상태, 생활화된 기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단련이 필요합니다. 그 단련이란, 곧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협조, 협력, 바로 구체적으로 기도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며 충실히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세끼 밥 먹듯이 규칙적으로 즐겁게, 기쁘게 즐길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고가 필요합니다. 만일 누군가 용변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대신해서 용변을 볼 수 없으며, 화장실까지 가는 노력과 수고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현대의 순교는 곧 시간의 순교라는 말도 있습니다. 시간을 내는 것은 사랑을 내어드리는 것이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것은 이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내어 그 시간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시간을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죤 채프만은 <기도를 잘하는 길은 기도를 많이 바치는 것이다.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면 최소한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기도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도함으로써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기도 안내 1. 고요하게 있기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이것은 부동자세에서 고요하게 있는 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고요히 있으면서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인들은 불행하게도 그만 신경이 잔뜩 긴장되어 있어 거의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을 배우려면 우선 가만히 잇는 것부터, 자신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고요의 형태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는 이러한 조용함과 고요함 자체가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몸의 감각들을 알아차리는 동작을 반복하십시오. 그런데 이번만큼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부분도 빼놓지 말고 옮겨가면서 온몸을 의식해 보십시오.

각 부분의 모든 감각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어떤 부분에서는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각 부분에 몇 초가량 머물다가,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거든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십시오.

여러분이 이 훈련에 좀 더 숙달되어 어느 부분에서든지 여러 감각들을 느낄 수 있 을 정도로 한층 예민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상태에 서 잠깐 머문 다음 보다 많은 감각들을 느낄 수 있는 부분으로 옮겨가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머리에서 발로 천천히 옮겨가면서 의식해 보십시 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런 식으로 15분 정도 계속 하십시오.

인식력이 예민해지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극히 미미한 감각들을, 너무도 미묘하여서 깊이 정신 집중을 하여 깊은 평화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미묘한 감각들까지도 알아 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자기 몸 전체를 하나로 의식 해 보십시오. 온몸 전체를 갖가지 감각들이 뒤섞 여 있는 한 덩어리로 느껴 보십시오. 이 의식 속에 잠시 머물고 나서 다시 머리에 서 발까지 옮겨가면서 각 부분의 감각들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런 다음 다시 한번 자기 몸 전체를 하나로 의식하면서 그 속에서 쉬십시오.

이제 자기를 압도하고 있는 그 깊은 고요를 의식하십시오. 자기 몸이 완전히 고요 해졌음을 의식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몸에 대한 의식을 놓칠 정도로 그 고요 속에 서 넋을 놓고 쉬어서는 안 됩니다.

분심이 들게 되거든 다시 한번 머리에서 발로 훑어 내려가는 동작에 마음을 쓰면서 몸의 각 부분의 감각들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나서 다시 한번 자기 몸속의 고 요를 의식하십시오. 이 훈련을 그룹에서 실시하는 경우에는 방 전체에 감돌고 있 는 고요를 의식해 보십시오.

이 훈련을 할 때에는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 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퍽 힘들겠지만, 매번 움직이고 싶거나 긁고 싶거나 안달이 나서 못 견디겠을 때마다 그냥 그런 충동들을 의식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응하지는 말 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예리하게 의식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런 느낌이 서 서히 사라지게 되고 숨이 다시 고요해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들은 꼼짝도 아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무척 고통스러워합니다. 신체적인 고통조차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근육이 긴장됩니다. 만일 몸이 긴장되거든, 그 긴장을 의식하게 될 때까지 필요한 만큼 시간을 보내십시오. 어느 부분이 긴장되는지, 어떤 느낌의 긴장인지를, 그리고 그 긴장이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느끼며 가만히 있으십시오.

 

신체적인 고통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활동을 할 때에는 아무리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하더라도 온몸이 군데군데 쑤시고 아프게 되면서 몸이 부동자세에 저항하게 될 것 입니다. 그렇게 되거든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어 그 고통을 덜하게 하려는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그냥 그 아픔을 예리하게 의식하기만 하십시오.

 

한번은 불교식 피정을 하는 동안, 우리는 한 시간 내내 꼼짝도 안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만 책상다리를 하고 앉게 되었는데, 무릎과 등이 어찌나 쑤시고 아프던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 생애에 그렇게 몸이 고통스럽고 아픈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몸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며 그 감각들을 의식해야 했습니다. 나는 무릎이 하도 쑤시는 바람에 온통 정신이 거기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땀이 줄줄 흐르며, 곧 기절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아픔과 싸우지 않기로, 그 아픔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그 아픔이 덜해지기를 바라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냥 그것을 의식하며 그 아픔과 하나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느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그 아픔은 단 하나의 감각이 아니라 많은 감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끈거리는 느낌, 밀어내고 잡아당기는 느낌, 때때로 예리하게 쏘아대는 느낌…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 등… 그 순간 나는 그 아픔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알아차리기 동작을 하는 동안 나는 내가 그 아픔을 제법 잘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그러면서도 몸의 다른 부분에서 느껴지는 다른 감각들조차 의식할 정도로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서 아픔을 참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훈련 중에 여러분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지 않는다면, 아마 나처럼 그렇게 고통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데는 익숙해지기까지는, 처음에는 어딘가 아프게 마련입니다. 이 아픔을, 그 자체를 의식함으로써 이겨내십시오. 여러분의 몸이 드디어 고요해지면 그때는 풍부한 보상을 받게 되어 이 고요가 가져다주는 고요한 천상적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초보자들이 겪게 되는 또 다른 유혹은 긁고 싶은 충동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몸의 감각들을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면서 가렵고 따끔거리는 감각들을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감각들은 늘 거기에 있었으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은 심리적으로 우리 몸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현상이 있거나 또는 인식력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려운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계속 움직이지 말고 그냥 그 가려운 부분 하나하나를 의식하십시오. 그 가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의식하며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려운 부분을 긁고 싶은 충동을 물리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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