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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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예전 베트남에 살 때, 오늘처럼 베트남 형제들과 함께 한국 순교성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었습니다. 그때 예수회 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신학생이 <한국 교회사>에 관해 제게 물었습니다. 그 이유인즉 자신이 수강하고 있는 교회사 시간에 한국 교회사를 배우긴 하였지만, 더 잘 알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트남 역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이고 한 때는 저희 나라보다 성인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베트남의 순교자와 다른 점과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많은 순교 성인들을 배출한 외적인 결과에 있지 않습니다. 그 자랑스러움은 첫째,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태어난 세계 유일무이한 교회라는 점이며, 둘째 갓 태어난 신생교회가 여러 차례의 박해를 꿋꿋이 신앙으로 극복해 냈으며, 셋째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또한 교회 내의 주교와 사제와 평신도 등 모든 계층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런 특수성을 전제로 하고 한국순교 성인들의 영성을 말할 때 저는 낮춤, 겸손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많은 분이 참으로 겸손의 삶을 사셨습니다. 반상의 구분 곧 계급의 구분이 뚜렷했고, 남존여비의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였는데, 어찌 그토록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출 수 있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자 선비이며 양반이었던 신앙의 선조들은 일단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지금껏 지켜 왔던 모든 신분의 차이와 남녀 구별 등의 관습과 제도를 기꺼이 벗어던져 버리고 함께 어울림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백정들까지도 품으셨고 형제자매로 대하셨습니다. 배운 자가, 있는 자가, 기득권을 가진 자가 내려오니 복음은 일사천리로 퍼져나갔던 것 같습니다. 윗물이 맑고, 윗물이 모범을 보이니 아랫물 역시 맑게 되었고, 그야말로 신명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끈끈한 정이 있고 서로가 낮추며 애덕의 신앙생활을 하니 박해 중에도 서로를 격려하며 용감히 순교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이 땅의 교회 공동체는 초대 교회의 모습 곧 사도행전의 첫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당시 교우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가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아무 것도 없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베풀 줄 알았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주니, 이 불행한 시절보다 우애가 더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이 일을 목격한 노인들은 그때에는 모든 재산이 정말 공동으로 나눴다고 말한다. 신입교우 중에서 남보다 학식이 많은 이들은 자기 집안이나 이웃에 있는 무식한 이들에게 기도문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본분으로 알았다.> 얼마나 복음적이고 사도적인 공동체였습니까? 그리스도교는 시작부터 낮아짐과 내려옴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우리가 무얼 그리 잘났다고 내려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신앙의 선조들은 분명 비우고 낮아지며 어울려 사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순교는 자신의 뚝심이나 고집, 자신이 내세우는 신념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 은총을 지키며 받아들이면서 함께 고난과 고초를 더불어 짊어졌기에, 저곳에서 누릴 영광과 축복을 지금 바로 이곳에서부터 천국을 만들어나갈 줄 알았던 그분들이었기에 순교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삶의 희망을 바로 현세에서부터 만들어나갔던 이들이 천국 영생의 행복을 차지한 한국의 순교성인들입니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에 교회가 들려준 복음의 메시지(Lk9,23~26)는 바로 순교자들이란, <예수님을 뒤따르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선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당신께서 누구를 위해 살아가며, 무엇을 실현하셔야 하는지를 삶으로 먼저 손수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처절하게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우리가 자주 들어 알고 있는 것처럼 제자란 곧 따르는 사람,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제자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신을 버려야만 합니다.(9,23참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어떤 협상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으며,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욕심 등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지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고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어 나온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자신을 버린다.>는 말씀의 이유이자 의미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삶의 방식, 예수님의 여정인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 역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느 특정한 장소나 시대가 아닌 모든 시대에 모든 곳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무릇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 제자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지>(9,26) 않아야 합니다. <부끄럽게 여기다.>라는 동사는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고백과 관련되는 말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자주 사용되어왔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로1,16)는 것을 자신의 사도직과 삶의 표어처럼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서 소개합니다. 바오로의 굳은 확신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의 체험을 당당하게 증언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2티1,8)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은 지상에서 온갖 박해와 시험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그분을 믿고 그들의 운명을 걸었기에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처럼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입니다.>(3,9)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하신 그분들의 심정을 잘 대변한 듯싶습니다. 생애 내내 수많은 고통과 시험을 당하며 사도 직분을 수행했고 마침내 순교하셨던 바오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 그리스도를 따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격려와 용기를 심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8,31.33.34.39) 순교자들은 매일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 했기에> 그 순교의 시간을 맞아 두려움 없이 주님의 도움과 사랑에 힘입어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시련과 환난과 갈등의 어려움에도 신앙의 선조인 한국 순교성인들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을 통해 찬미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03위 성인들뿐만 아니라 시복 준비 중에 계신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오늘 대축일뿐만 아니라 순교자 성월을 열심히 살아갑시다. <순교자 믿음 본받아 죽도록 충성하리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 깊이에 순교 정신을 되새기며, 모든 삶의 자리에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 충실히 증거하며 살아가는 이 주간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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