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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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살아오면서 직면하는 의문이지만, 정말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사랑으로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심을 느끼고 살아왔는데도, 그리고 수도원에서 늘 주어진 모든 일과표를 따라 충실히 살아왔는데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내적 텅 빔과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 제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의 의문을 마르코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제게 부족합니까?>(Mt19,20)라고 질문하자,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Mr10,21)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Mt6,20~21)는 말씀을 전제하고 들으면 더 좋겠지요. 이 말씀은 바로 모든 인간의 실존이며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인상은 그의 질문에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의 질문은 지극히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0,17)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곧 그의 관심은 <존재>의 측면보다 <활동이나 소유>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마치 자신의 행위나 소유로 취득하고 획득할 수 있다는 의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지극히 교만하고 당당한 태도를 제쳐두고 대견하게 여기시며 그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선하지 않다.>(10,18)고, 그의 질문에 동일한 눈높이에서 답변하십니다. 답변의 근저에는 선이란 무슨 <일, 활동>이 아니고 어떤 분 곧 <존재>라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잘못된 관점을 선한 마음에서 수정해 주십니다. 곧 요점은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하신 분이신 하느님뿐>이십니다. 이러한 그릇된 관점은 단지 부자인듯한 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또한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 봅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취득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살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끔은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분명 그가 한 질문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너는 계명을 알고 있지 않느냐? 계명을 지켜라>(10,19; 밑줄 친 부분의 저의 첨가)고, 고쳐 답변하신 의도를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내리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 계명을 지켜라.’고 언급하시는데 그 계명이란 모든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십계명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명쾌하게 그런 계명들을 다 지켜왔노라고 응답하면서 이에 대화를 끝내지 않고,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10,20) <그럼에도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아직도 제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저의 첨가)라고 묻습니다. 이는 곧 그의 내면 깊이 내재해 있는 <초월적인 그 무엇을 향한 갈망>에서 기인한 물음이라고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시려는 듯싶습니다. 물론 그 질문의 밑바닥에는 <완벽하고 완전해지고 싶은 욕심>이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열정 내지 젊음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화의 결과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0,21)는 회피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해답을 그에게 던집니다. 예수님은 그의 선한 의도를 꿰뚫어 보셨기에 그에게 다소 충격적이고 역설적인 제안을 하셨던 것이라 봅니다. 그것은 그가 보다 <완전한 존재>를 꿈꾸고 있다고 보았기에 지금껏 몸에 밴 관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의식과 행동 양식을 보여 달라고 초대했지만, 그는 결국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복음은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갈망하던 <완전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까닭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어쩜 머리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온 존재로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진실은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애착 곧 나와 나의 소유물 그리고 나의 꿈과 이상, 내가 살아온 세상과 관계에 억눌리고, 묶이고, 사로잡혀서 그런 모든 것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추구할 수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단지 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 우리의 내적 현실이며 상태입니다. 신앙생활 혹 제자의 삶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상상이 아닌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10,22)고 씁쓸한 결말을 담백하게 전해 주고 있지만, 그 여운은 무척 짙고 무겁습니다. 

 

그가 슬퍼하며 되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서 예수님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10,23)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는 영생의 문턱에 도달하였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걸림돌은 다름 아닌 <하느님보다 재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영원한 생명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관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냐, 재물이냐>(6,24)는 선택과 결단의 문제는 결코 생각만큼 쉬운 선택과 결정이 아닌 자신의 온 존재를 다 걸고 해야 하는 절박한 선택이며, 이는 단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놀라자, 예수님께서는 거듭해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19,25)고 부언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척 알아듣기 쉬운 표현이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참 어렵습니다. 표현 그대로 이해하자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한마디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강조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단적인 표현에 제자들이 경악하며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10,26)라고 당연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의문처럼 <정녕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납니다. 이런 제자들의 놀란 표정과 태도를 눈여겨보시면서 예수께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10,27)는 해법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 과격한 비유 이면의 초점은 바로 구원이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된 표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곧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구원 곧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자력 구원), 곧 세상의 재물이든, 권력이든, 선행이든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4,12)는 베드로 사도의 재판정에서 증언은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되고 터득한 신앙고백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가 그토록 원하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 자기 앞에, 자기 가까이 와 있었는데도, 그 구원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소유한 세상적인 재산에 대한 애착과 미련 때문에 구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Mt5,45) 분이시기에 원하시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부자들을 단죄하신 것도 아니고 구원에서 배제하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당연히 구원될 것이며 구원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부자들이 흔히 겪는 문제 곧 세상의 재물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느님의 자녀로써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마치 재물이 구원해 주는 것인 양,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고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부자가 상대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간 내면에 뿌리 깊은 소유욕과 재물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많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많이 소유하였으면서도 그 재물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섬김과 자신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처럼 자신의 소유로부터 자유롭고,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성서 가운데 예리코의 자케오입니다.(Lk19,9) 그는 자신이 소유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횡령한 것에 네 곱절로 갚아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도 부자였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묻을 무덤을 마련하였으며(Mt27,57) 니코데모도 역시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시신에 바를 향료를 가져와 예수님의 장례를 도왔던 사람입니다.(Jn19,40)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유가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는 들어가는 곳, 장소가 아니라 누리는 것,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양적인 물질이나 재물의 소유 여부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기준이 아니라, 지금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삶을>(Lk12,21참조) 사느냐 살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소유가 자신을 가난하게 하는 어리석은 탐욕에 빠지느냐 아니면 탐욕에서 벗어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소유를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면서 사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2코8,9참조)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존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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