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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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풀리지 않은 인생의 의문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하느님을 직접 뵙고자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고, 삶 속에 드리워진 어둠과 고난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욥은 다음과 같이 고난 가운데서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욥19, 27)
                       
어쩌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인생의 의문을 묻고 답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뵙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듣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업적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과 영의 눈(靈眼)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은 모든 사물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주더라도, 믿음 그 자체가 보는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 뵙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와서 보아라.”(요1,39)고 초대하신 것은, 보아야만 믿는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며 사랑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행적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에로 이끄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 현존하셨던 그분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토마스 사도와 똑같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20,25)라고 말한 것은 그의 불신을 드러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토마스’라는 뜻은 본래,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것을 좋아하는 토마스 사도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보고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그 표현 자체로 토마스 사도의 신앙과 인격을 낮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는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보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중 하나는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을 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까지 마치 선글라스를 끼고 살아왔다면, 오늘부터는 선글라스를 벗고 제대로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 선글라스를 벗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더 이상 속하지 않기에 현세에 동화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마음과 시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 때”(로12,2)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은 토마스의 의심을 탓하기보다 토마스의 신앙의 눈높이에 맞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토마스는 물론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0,27) 예수님은 토마스가 원하는 경험에 의한 증거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시면서도, 의심을 버리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더 이상 만지거나 손을 넣어 보는 일을 포기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토마스의 응답은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표현처럼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0,28) 그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최고의 호칭인 ‘하느님 그리고 주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토마스는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이름처럼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회의하면서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노력합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은 회의이고, 이 의심이 믿음을 강하게 깊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물론 신앙은 하느님의 은사이기에 주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그 믿음이 깊어가는 것이지요. 어쩌면 정직하게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참으로 믿게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토마스가 지녔던 정직함을 지닐 수 있도록 청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토마스 사도에게 감탄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믿게 된 다음에 철저하게 투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을 뵙자 그분께 다가가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실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주님, 당신은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이라고 믿고 투신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우리 또한 그의 투신을 본받도록 청합시다. 그를 철저히 변화시킨 것은 부활 이전과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손과 옆구리의 상처들은’ 곧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하느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의 영원한 표지입니다. 저나 우리 모두 토마스 사도처럼 그렇게 투신할 수 있기 위해서 그분 사랑의 표지를 마음으로 보고,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는 단순함을 지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숱한 의심과 회의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뵙는 일은 감정이나 이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죄와 배신과 의심에 대하여 분노나 복수가 아닌 오직 자애로운 염려와 배려만 하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서 용서와 평화, 성령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26)라고 인사하십니다.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얻은 평화이며, 죽음을 통해 이루어 낸 평화입니다. 당신의 희생으로부터 온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하실 때, 거기에는 당신이 고통을 통해 성취한 화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평화를 잃지 않도록 늘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 안에 머물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우리는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에(1요5,4~5참조)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부활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4,32~33참조)
 
오늘은 특별히 하느님 자비의 주일이기도 합니다. 경험적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은 철저한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난 후에야 비로써 자신을 하느님에게 개방하고 의탁하게 됩니다. 알콜 중독자를 치유하는 12단계 프로그램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중독자는 ‘스스로가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과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할 때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게 됩니다. 오늘 하느님 자비의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실패와 불신, 나약함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처절하고 온전하게 내어놓고 맡깁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수난을 보시고,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거룩하신 하느님, 전능하시고 영원하신이여, 저희와 온 세상에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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