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8,12~13)
제가 세상 살아오면서 깨닫는 것은, 모든 생명은 기적이고,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이라고 느껴집니다. 기적이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서 평범하지 않은 말과 행동이 함께 인생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고 들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하늘에서 오는 무슨 표징을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제게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표현처럼 기도 가운데서 환시도 저는 바라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기적과도 같이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매일 살고 있는데 무슨 특별한 기적이나 표징이 필요하겠습니까? 삶이 기적이고. 기적 같은 삶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는 사랑이 기적이고 용서가 기적이며 기도가 기적이기에, 제가 하는 모든 것이 다 기적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8,12)라고 말씀하신 후,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8,13) 는 표현이 마음을 흔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는 표현에 예수님의 심정이, 마음 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믿음이 없고,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 영원한 것보다 사라질 것에만 관심을 두는 그들을 내버리고 떠나가셨다는 뜻이겠지요.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시고 힘드셨으면,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그들을 매몰차게 먼저 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복음은 한 마디로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셨다, 라고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편에서 건너편으로 떠나신 것은 결국 대화의 중단이며 단절이고, 불통의 상징적인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기대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도 누가 누구를 버리고 떠나간 소식, 대화의 자리에서 의견 절충이 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버려둔 채 떠났다는 소식 등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시다가 대화가 되지 않아서,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하고 당신 먼저 그들을 버려둔 채 떠났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왜 그들을 버려두시고 떠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가시지는 않겠지만, 어린 시절 제가 가장 무섭고 떨린 엄마의 표현은 ‘엄마 말 잘 듣지 않으면 엄마 꽉 죽어버릴 거야 혹은 도망갈 거야!,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존재인 엄마나 혹 그 어떤 사람이 저를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버려두신 채 건너편으로 가셨다, 는 표현은 제 어린 시절의 아픔을 건드려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만일 “주님께서 저를 버리신다면 어찌하나!”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일어납니다.
주님은 아주 그들을 버리신 게 아니라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읽으시고 잠시 자리를 떠나 숨 쉴 여유를 갖기 위한 지혜로운 처신이었다고 봅니다. 상대방이 자기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 또한 쉼 없이 그들의 마음을 문을 열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잠시 훗날을 기약하면서 떠나가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했듯이,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마르6,11) 는 말씀의 실천이라고 보입니다. 늘 당신을 찾는 군중들을 남겨 두고 다른 곳으로 선뜻 떠나가셨듯이 그렇게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때를 알고 떠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응답해야 하는지를 잘 배울 수 있었으면 싶네요. 전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믿기에 주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받지 않기 위해 주님을 꼭 붙들고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저를 버려두고 가시지 못하도록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고 주님만을 꼭 붙들고 살렵니다.
인터넷에 「버려두고 가는 인생」이란 아름다운 글이 있더군요. 이는 제목처럼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붙들고 살기 위해서 불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내려놓고, 버려두고’ 살자는 의미의 글입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옮깁니다. 『기왕 버릴 것 버려두고 가야 하는데 미리 버리는 것이 지혜인데 욕심 하나도 못 버리고 믿는다는 말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왔나이다. 세상을 쉴 사이 없이 걸어가는 인생인데 결국 버려두고 떠나는데 자존심 하나도 해결 못하고 분노만 가득 채워 왔나이다. 편한 세상이 없는데도 욕심에 속고 교만에 속으면서도 요령만 앞세워 실상은 속은 자가 되었나이다. 버려두고 가는 인생 그것이 나의 전부인데 모아두고 사는 것이 인생 전부인 것처럼 어제도 오늘도 걸었나이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 버려두고 주님만 쫓아가는 믿음의 걸음 걷게 하소서. 아멘』(로뎀가페에서 이데보라)
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2024.02.11 20:19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코 8, 1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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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오 9, 14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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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 22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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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마태오 6, 1 ~ 6. 16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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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마르코 8, 14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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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마르코 8, 1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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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루카 12, 35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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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코 7, 31 –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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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간 목요일: 마르코 7, 24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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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코 7, 14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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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미끼 동료 순교자 기념(연중 제5주간 화요일): 마르코 7, 1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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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가타 순교자 기념(연중 제5주간 월요일): 마르코 6, 53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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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토요일: 마르코 6, 30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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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1): 루카 2, 22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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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목요일: 마르코 6, 7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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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보스코 기념(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마르코 6, 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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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화요일: 마르코 5, 21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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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간 월요일: 마르코 5, 1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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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간 토요일: 마르코 4, 35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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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기념: 루카 10, 1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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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 16, 15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