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랜 세월 동방 전례의 전통에서 살아오신 ‘이냐시오 드 라타키에’ 총대주교님은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현대 교회에 성령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잠시 들어볼까요?
『성령이 아니시면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며 교회는 수많은 기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권위는 지배로 변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깡마른 과거의 추억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의 윤리로 바뀐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온 세상이 부풀어 올라, 새 세상을 낳는 출산의 소리를 지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성삼의 친교가 된다. 권위는 자유를 낳는 봉사가 되고, 선교는 오순절 사건이 되며 전례는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끌어당겨 지금 여기에서 맛보게 하는 잔치가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배신에 따른 죄책감 그리고 유다인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을 떨쳐 일어나, 복음 선포의 굳센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도 그 같은 힘을 주십사고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안일했던 신앙, 배신적인 삶, 비겁했던 복음 정신, 나약했던 믿음에 활활 타는 불꽃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령 송가와 복음 환호성’에서 힘이신 성령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 주님,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행복의 빛’이신 성령님께서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비록 우리가 세속에 얽매여 신앙의 참된 진리를 증거하지 못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으로 위로받고서 또다시 성령의 뜨거운 믿음을 청해 봅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3, 17~18)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문을 모두 닫아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왜 성령을 통해, 용서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당부 말씀도 많으셨을 텐데! 사실 성령은 제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인도하시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가 공동체의 바탕이요 토대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지 않을 때, 또 이를 망각할 때,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할 때 우리의 선포는 개인적인 치적이나 영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살다 보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서로 받은 상처와 아픔, 분노와 앙갚음에서 연유된 것인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닫곤 합니다. 저 역시도 베트남에서 함께 살았던 필리핀 형제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을 때가 많았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인식 차이는 물론 공동체 생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 그에 따른 삶의 양식이나 습관의 차이로 마음이 불편했고 힘들었습니다. 생각으론 다름은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다, 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으로 동감하기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없는 상황에서 무려 5개월 동안 저와 그 형제만이 살아야 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간이 저에게는 힘든 도전의 시간이었고 저 자신과 처절한 싸움의 기회였습니다. 저를 단련하고 정화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하느님의 영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의 상태, 혼돈이고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이고 어두움의 심연과도 같습니다. (창1,2참조) 이런 닫힘의 상황을 벗어나도록 이끄는 힘은 주님의 영에서만 나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2,7) 화답송 후렴은 이 신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는 생명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닫힌 다락방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영적 갇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시는 힘이십니다.
어느 시인이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바다가 넓어서 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배가 다니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넓어서 비행기가 마음대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 비행기가 다니는 길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각도 자유스럽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생각하는 길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자신만의 생각의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 보이는 산길도 사람이 자주 다니다 보면 길이 나듯이, 사람의 생각도 한번 그 길이 뚫리면, 그 길로 생각하고 사유하게 됩니다. 용서란 자신이 갖고 있는 이런 좁은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일상의 틀에서 한 번 벗어나 봐야 한다고들 합니다. 고정된 틀을 깨보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멀리 떨어져 봐야 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풀리지 않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는 멀리서 바라보면 뜻하지 않았던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성령은 우리에게 소중한 생각을 주곤 합니다. 성령은 닫히고 폐쇄된 공동체에 죄의 용서와 함께 화해와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방향을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위해 자신의 영적 내면을 올바르게 정리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면, 그때까지 걸어온 길에 마음을, 미련을 두지 말고 기꺼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그때에 평화가 새롭게 시작합니다.
성령은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통해, 주님과 우리 서로를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주님 사랑을 통해 폐쇄적인 우리 마음속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생명의 물과도 같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거나 막혀 있으면 점차 썩어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명의 물은 나를 통해 이웃을 향해 모든 피조물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은총은 모두를 위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해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신다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코 12,6-7)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인 구원의 신비를 알아가는 지혜, 믿음의 신비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통찰, 마땅히 해야 할 선과 피해야 할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의견,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 악과 싸워 순교할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공경,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기도드립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알렐루야”(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