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이 모든 일의 의미와 까닭을 알고 싶다는, 다시 말해 ‘하느님을 알고 싶다’는 성소의 동기는 시편 24편
야훼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로 이어진 다음, 종신서원 상본의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로 이어졌다. 처음엔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이 뭔가 특별한 일로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 보니 “있는 것 보고, 없는 것 안 보는 것이더라.”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날씨를 해석할 때와는 달리 시대나 사건의 해석에는 Wishful Thinking(我田引水) 이 끼어들 소지가 많기에 있는 것 안보고 없는 것 만들어보기 십상이다.
근래에는 하느님을 뵙기 위해 필수라고 성현들이 말하던 ‘가난과 병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우치는 중이다. 야훼의 넷째 종의 특성이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을 뵙는 일은 처음처럼 다시 특별한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