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은 왠지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의미요법) 을 연상시켰다. 예수가 한 고을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행복이란 삶의 의미를 충족시킬 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생각나게 했다.
이 치료법의 요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의미를 찾아낸다면 이겨낼 수 있다" 정도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미 나치의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의 대처와 반응을 관찰했고, 그 자신 역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처절하리만치 노력하였다.
그래서 많은 심리치료들이 고통을 단지 "회피" 하거나 긍정적인 정서를 최대한 많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돕지만, 의미치료는 접근 자체가 다르다. 의미치료는 고통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다른 치료법들이 고통을 피하도록 돕는다면, 의미치료는 고통 앞에 당당히 마주해서 그것을 꿋꿋이 버텨내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치료사든 내담자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 앞에 마주할 가능성은 엄연히 존재하기에, 누가 누구를 교정해 주고 격려해 주고 그런 거 없다. 그저 똑같은 처지의 인간끼리 만나서, 압도적인 고통 앞에 마주한 채, 그 고통이 가져다 줄 의미를 탐구하는 것뿐이다. 고통을 피해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는 고통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최악의 고통이 닥쳐왔을 때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살아내야할 많은 시간과 고통을 앞에 둔 사람들에게 힘이 될지 아니면 더 의기소침하게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