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불여일견 ( 百聞而不如一見 )
백견이불여일행 ( 百見而不如一行 )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느니만 못하고
백번 보는 것이 한 번 행하느니만 못하다.
임어당의 아주 현실적인 중국식 유머를 대입해보면 한번 행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주로 먹고 마셔 피가 되고 살이 되듯 일치하는 일이 될게다. 임어당은 그의 명저 ‘생활의 발견’ 에서 중국이 생물학을 비롯한 과학 전반의 발전이 더뎠던 이유를, 생물이나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요리를 하면 더 맛있을까 즉 腹에 관심이 더 많았던 까닭이라 너스레를 떤다. 그 결과 다리 달린 것 중에 중국인의 식탁에 올라 오지 않는 것은 책상밖에 없게 되었다^^. 탁월한 생활심리학자인 중국인들이 먹고 마심의 중요성을 간과할 리가 없다. 그래 타인의 심중을 잘 아는 이를 그 사람의 腹心이라 하지 않는가!
‘현실주의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유대인들도 일찍 부터 일상 생활에서 ‘먹고 마심’ 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았기에, 유월절 전례에서도 핵심적인 상징이 되었을게다. 부인이 아무리 성장을 하고 몸치장을 해도 의식하지 못하는 남편은 많아도,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을 간과하는 이는 없다. 남다른 통찰력을 지녔던 예수님에게도 유월절 전례의 상징은 의미심장했을 터, 예수님은 이를 다시금 재해석하고 심화하여 성찬례를 제정한다.
복음의 효시로 타복음의 모델이 된 마르코 복음은 예수의 일생에 걸친 활동과 그 의미를 두 개의 대표적인 비유로 요약한다. 복음의 전반부를 아우르는 것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 씨는 곡물이 되고 빵이 되어 사람들을 먹인다. 예수생애의 후반부는 당대 사회의 지배자들에게 정의와 공정을, 소작료를 요구하며 벌어지는 갈등과 그 결말을 보여주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로 요약된다. 예수는 이러한 두 측면의 활동을 최후의 만찬에서 하나로 결합하며, 이러한 일을 계속해 나가라는 당부를 한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당신이 하던 일을 이어서 해 나가는 이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라고.
이런 번거로운 합리적 추론을 백번 듣기보다 직접 마음에 호소하는 음악을 듣는 것이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를 사는것이겠다.
Nearer, My God, to Thee
https://youtu.be/v1mQT1u_45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