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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복음 사색

성.마르코 복음사가

by 후박나무 posted Apr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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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던 작은 나뭇잎들이 봄비에 한껏 부풀어 숲이 풍성해졌다. 초록빛 싹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솟아나고. 아마 지금이 주자(朱子)의 우성(偶成)이란 시를 읊기에 좋은 때 같다.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 (계전오엽이추성)

못가의 봄풀은 아직 꿈에서 깨지도 못했는데,

섬돌 앞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이다. 마르코와 나는 다른 복음사가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처음 마음이 끌렸던 것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그의 문장이었다. 첫 문장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이고 본래 복음의 마지막 문장은 16:8로 끝난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하자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유학가기전 87, 88, 89년 매주 월요일마다 오전엔 장미원에서 오후엔 삼양동 달동네에서 성서공부를 하였었다. 그때 첫 교재도 마르코 복음이었고, 박도세신부님의 부탁으로 도널드 시니어 신부의 Passion Narrative Series 4부작을 완역했는데 처음 번역한 것도 마르코였다. 마음에 짚이는 이유는 아마도 가톨릭대학 강단에 처음 설 때 선배 교수신부님이 농담반 진담반 해주신 말씀과 마르코 복음의 속내가 일맥상통하는바가 있어서 일 것 같다.

 

처음 강단에 서면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가르치려하고

좀 시간이 지나면 아는 것만 가르치다가

더 원숙해지면 필요한 것만 가르친다.

마지막엔 기억에 남는 것만.

 

마르코 복음은 보통 3등분 하는데, 가운데 토막만 알면 자연히 3등분이 된다.

흔히들 제자교육이라는 벳사이다의 소경이야기에서부터 예리고의 소경이야기 까지다. 앞의 “화려한 십자가” 에서 썼듯이 우리를 포함한 제자라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의 미망에 싸인 벳사이다의 소경들이다. 예수는 3번의 수난예고를 통해 화려한 십자가, 화려한 메시아, 입신양명과 출세를 꿈꾸는 제자들의 미망을 깨려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예수만이 갈릴레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전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이제 제자들은 화려하게 성공을 거두고 인기도 있던 갈릴레아로 돌아가 예수를 모델로 다시 시작해야한다. 그리하여 예리고의 소경처럼 진정한 제자가 될 때 수난사화도 완성될 것이다. 나의 눈으로 본 마르코의 간결한 메시지다.

 

진인만이 진지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어느 파킨슨 전문의는 병을 수용하는데 만 최소 3년에서 5년이 걸린다고 한다. 비록 병일지라도 온전한 수용만이 존재를 진실하게 하니, 아직 진인과는 거리가 멀어 진지도 결여된 내가 걸핏하면 일탈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도 인정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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