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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4계중 늦가을 혹은 겨울!

by 후박나무 posted May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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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4계중 늦가을 혹은 겨울!

 

이제 여생이라곤 5분의 1 정도 남았을까... 그 삼분의 일을 잘 살기위해 필요한 준비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은 우리의 인생이 위로 올라가는 여정이 아닌 것을,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내리막길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우리네 인생에는 올라가는 고양의 길이 있는가 하면 점점 작아지고 졸아드는 쇠퇴의 길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서서히 해체되고 삶의 많은 국면에서 속절없이 물러서야만 하는 국면 말이다.

 

나름대로 비교적 멀쩡한 육신이 있는데 할 일이 없다면 어떻게 처신해야할까? 그럴 때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 나름대로 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인생의 사계를 모두 준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그저 뭔가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하늘아래 모든 것에는 자신의 때가 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쇠퇴와 쇠락의 시기를 살면서 우리는 하늘아래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을 스스로도 알게 되고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중 대다수는 쇠락이나 졸아드는 체험 혹은 해체 당한다든가 패배라는 도전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아래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살아야 하는 사목자로 불렸다면, 우리는 쇠퇴까지도 이해하는 전체적인 온전한 인간이어야겠다. 이 시기에 사목자의 가장 위대한 미션은 아마 이런 식으로도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겠다.

 

이 쇠락의 시기를 살아가는 방법을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이해해보자. 하나의 랍비였던 나자렛 예수의 마지막 나날을 함께 들여다보자. 그는 어떻게 자기인생의 마지막 내리막길을 대면했는지 또 어떻게 받아들이고 걸어갔는지!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이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물론 십자가의 길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나자렛의 랍비가 자기인생이 내리막길에 처해 있음을, 이제부터는 내리막길만 남았음을 처음 체험한 순간은 베타니 에서였다. 그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들어갔는데, 아마도 그는 공생활을 시작한 후 그런 식의 대접은 처음 받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발을 씻어주지 않았고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으며 환영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예전처럼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추종자나 제자들의 편에서 뭔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도 나름대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심지어 그의 가장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그를 환영하고 기름을 바르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해왔던 일이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감지하고 있으며, 그를 초대했던 주인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예수의 편에 서서 계속 한 몫을 차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 없이 흔들리고 있다. 시몬이 예수라는 랍비의 편에 섰던 때는 그가 상승세를 탈 때이지 지금같이 내리막길에 서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자렛의 랍비 예수는 환대와 같은 인습적인 지지 없이 또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배우고 있다; 제자들 역시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들 역시 인생의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랍비예수와 함께 걸을 수 없다. 시몬의 집에서 발에 기름을 발라주기는커녕 씻어주지도 않았던 일은 집주인인 시몬이 더 이상 랍비 예수와 가깝게 지내고 그의 일에 찬동을 하는 일에 확신이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해체되어 사라지고 있다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위해 살고 그 일을 위해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랍비 예수에게는 호산나 하고 외치던 환호성이 하루아침에 조소로 변하는 경우일 것이다. 반면 예수의 추종자나 제자들에게는 성공을 위해 동참한 일이 실패로 드러나고 있으므로, 지금 그들은 랍비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회의하고 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임박한 파국을 향해 가고 있는 그분의 발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그분을 환대하였다; 그녀는 실패하여 좌절한 사람까지도 환대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랍비 예수에게 필요한 것은 환영받고 기름부음 받는 접대임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예수는 성서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을 그 여인에게 한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한 이 여인의 이야기도 전해질것이다. 이 모든 것의 이유는 그 여인이 랍비의 발을 씻겼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는 그 옛날 산상에서 수천의 추종자들이 모였을 때의 메시지와는 달리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들이라면, 스승이 겪는 모든 인생의 시기를 우리도 겪어야 하며 그것과 함께 살 수 있어야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볼 것은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이다. 아라메아어로 저주받은 이란 말은 어떤 다른 출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처하도록 저주받았다는 의미는 아무런 탈출구가 없으며, 랍비 예수에게는 아무런 다른 길도 없이 그야말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처절하고 가혹한 현실이다. 랍비는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인식한다. 더 이상 이것은 여러 가지 선택 중에 하나가 아니다: 아무런 대안도 없는 외길이다. 죽음에 이르는 동반자는 옷 벗김이다.

 

옷 벗김 당하는 일. 관상가들에게 옷 벗김은 우리가 우리자신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모조리 벗겨지는 것이다. 인생에서 꽤 자주 우리를 감싸는 옷은 세상에 대해서 또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내가 누구임을 드러내준다. 그 옷이 모두 벗겨질 때, 우리는 발가벗게 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며 살고, 보여주고, 드러내던 그 모든 것이 벗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 옷 벗김은 옷을 잃어버린 뒤에 남은 것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가 놀라게 한다.; 우리가 모자나 옷에 걸었던 것이 그 무엇이든 이제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러한 죽음에서 피할 길은 없다.

 

이러한 상실에 따르는 고통은 전혀 상상치도 못한 아픔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충실하고 충만하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이제 와서 내가 누구인지 또 우리가 우리자신을 보아왔던 대로의 정체성을 다 빼앗기고 있다.; 이것은 고통일 뿐 아니라 그 모든 우리의 충실함에 비추어 심히 공평하지 못하게 느껴진다. 바로 이것을 통해 고통이란 우리가 격어내야 할 인생의 한 계절(부분)이지,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결코 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여러분이나 나나 모두가 아무리 충실하게 가난을 지키고 정결하게 또 순명을 지키며 살았다 하더라도 인생의 이 계절을 피해 나갈 수는 없고 살아내야만 한다....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그다음 내리막길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국면은 정원의 모닥불 곁에 선 베드로이다. 우리는 우정이나 사목 일을 어느 선 에서 적절히 제어하지 않으면 우리가 갖고 있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을 다 주어야 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베드로가 등장하는 이 장면에는 친밀하던 이와 결별하는 또 다른 고통이 있다; 마치 예수에게 또다시 자기가 완벽히 버림받았음을 상기시켜주는 이가 필요한 듯이!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은 ‘나는 그를 모른다.’ 이었다. 베드로는 골고다에 가지 않았으므로 친밀했던 그 관계를 깬 이 고통은 해소될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 모두는 인생의 이 계절에 다시금 전과같이 될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즉 친밀하던 관계들이 깨어지고 다시 회복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좀 젊었던 시절에 우리는 이런 식으로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일이 다시금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내리막길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이러한 내리막길이 우리자신의 힘이나 스스로의 의지로 관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나는 이 쇠퇴를 내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다; 누구든 인생의 사양길에서 성공해보고자 하나 단순히 일이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인생의 이 계절에 들어서서 이기는 경우란 없다! 우리는 어디서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가? 십자가의 길에는 세 번의 넘어짐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가로대가 있다, 그것은 그 자체의 무게만 보면 견딜 수 없을만한 것은 아니다; 범죄자는 그것을 처형 장소까지 옮길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이 그 가로대위에 첨부된다면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상황에서 관상가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가로대를 짊어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예수가 어깨에 짊어지고 날라야 했던 것은 무엇인가?

 

생산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구이며 발전에 꼭 필요한 촉매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타인들에게 그리고 후대에게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남기는 것은, 우리의 족적을 남기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이었는지의 핵심부분이다. 그토록 내가 노심초사해서 짜놓고 성취했던 일들을 어떻게 네가 해체시킬 수 있는가?는 바로 이런 관심의 한 표현이다.

 

예수는 가로대를 지고 가는 그의 길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보았다; 주변에 있어야 하고 있을 수도 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내주었던 그 친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덧붙여 예수는 그 자신의 전통으로부터도 온전히 절멸되어 있음도 잘 알았다; 자신이 왔던 그 뿌리로부터. 한 사람의 랍비도 이제 곧 죽을 자신을 변호해주려고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 작은 것에서 하느님을 보았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것 속에서 하느님을 찾았던 이 랍비 예수의 경우를 상상해 보라;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을 보았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자로 단죄 받았는데, 지금 그는 허무함과 버림받았음을 느끼고 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왜 예수는 자꾸 넘어졌는가를 이해해 보자; 우리는 모두 홀로 걸을 수는 없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초대받지 않은 누군가가 예수를 도우려고 왔다. 내리막길을 걷는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인생의 내리막길에 우리가 지고 걸어야 할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느끼는 고통 중에 최악의 것 일게다.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질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참 슬프고도 비참하게 참담한 현실인식이 될 것이다. 언젠가 더 이상 나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되고 다른 사람이 내 생활의 주도권을 가져가 고 나는 관리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나의 무능과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넘어지게 된다, 남의 도움을 안 받을 수 없게 되는 때, 그 시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우리 각자의 삶 언저리에 있다. 우리 모두는 넘어지게 될 것이며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며 그때는 우리 모두에게 올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십자가의 가로대는 내가 질 수 있는 것 보다 더 무거울 것이며, 넘어져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의 넘어짐은 결코 끝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세 번만이 아닐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온전하고 강하다면 몇 번 넘어진 후에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응답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이와 같은 자기방어는 거짓말이고 틀린 것이다. 나는 십자가를 질 수 있고 그것도 즉시 다시 할 수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바로 그때가 오기 전에는 누구도 이 쇠퇴의 시기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바로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이 인생의 계절을 받아들일 지혜와 지식을 갖게 된다.

 

베로니카가 수건을 들고 랍비의 얼굴 가까이 다가온다. 그 문화에서는 매우 적절하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특히 이 경우 예수는 누구에게나 멀리해야 할 단죄 받은 범법자이며 온갖 나쁜 사람들과 연루된 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로니카는 그에게 다가간 한 사람이며 그의 얼굴에 손을 대는 친밀한 행위를 한 여인이다. 그 쇠락의 길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멸망의 길 외에 남은 것이라고는 없는 그 사람에게. 그녀의 수건뿐 아니라 그녀의 기억에는 하나의 인상이 남는다.

 

(십자가의 길은 영성적인 훈련을 위해 아주 좋은 코스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2000년 전 십자가를 지고 갔던 사람의 육체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맞는 또 맞을 인생의 내리막길에 적용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대의 광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절대로 내리막길이란 없으며, 마치 내가 올바른 약이나 적당한 육체적 훈련 혹은 적절한 영적인 연습만 한다면 만사가 OK 라는 식의 거짓이 난무하는 시대에선...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분명히 인생에는 내리막길이 있다. 이러한 인생의 사양길을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주 중증의 심장마비 외에는 없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인생의 시기가 찾아왔음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겪기도 한다.)

 

이것은 부활이 모든 이를 위해 결정적으로 한번 일어났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상실과 내리막길의 각 여정에서 부활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매번 쇠퇴와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작은 부활이 일어나며 그를 통해 나는 다시 이 내리막길로 내려갈 수 있게 되며 이 쇠락의 계절을 전체적으로 더 잘 준비하게 된다. 만약 인생에 대한 나의 체험이 오로지 내리막길뿐이라면……. 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매 경우마다 작은 부활을 체험함으로 미래에 올 쇠퇴와 해체 그리고 패배까지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요한 10:10에서 읽듯이 예수의 사명은 생명을 풍성케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내가 과도하게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엇과 동일시했던 것들이 쇠퇴해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내가 자신과 과도하게 동일시했던 것들이 쇠락해가는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다른 무엇이 재건되며 그것이 나를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준비시킨다, 창조세계가 나에게 던질 NO에 대해서! 넘어질 때 나는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온전함이란 건강이 아니다; 온전함이란 건강이나 효율성보다 훨씬 더 큰 그 무엇이다; 만일 온전함이 그렇게 큰 것이라면, 나는 나의 육체적인 건강이나 효율적인 사목이 하양곡선을 그릴 때에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쇠퇴는 쇠퇴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환상에서 깨어남을 동반한다. 깊은 슬픔이 있고 나는 슬픔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내리막길에 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쇠락은 전체성의 회복을 위한 것인가.. 내가 관심이 없던 나의 한 부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내가 전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우리가 자신을 효과적인 미션이란 언어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면, 더 큰 길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 인생이 만일 오로지 하나의 사명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해내지 못할 때, 말기 암 환자로서 테르모세라피를 받을 때, 나는 지금 고통의 사목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므로 서 도망가지 마라. 나의 미션보다 더 큰 무엇이 나에게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쇠락의 길을 기꺼이 간다. 우리에겐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늘의 그림자를 얼핏 보기에 그 길을 기꺼이 갈수 있다. 특히 신앙의 공동체로 살 때 더욱 그러할 수 있다. 온전성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를 속일 수 없다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는 한; 자주 말하듯, 나는 나의 일부가 쇠락하더라고 결코 나의 쇠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즈음 텅 비어있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분명히 여기에는 쇠락이 있고, 이 시기는 개인으로서의 나와 공동체로서 우리를 위해 무엇이 온전한 것인가?를 물어야 할 때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태어났고 속하고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라는 우리 전통의 핵심적인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하기보다는 하나의 동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 봄으로서 종교의 진리가 품은 진리를 축소시킨다.)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신화는 인생의 사양길을 다른 인생의 계절과 같이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릇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황혼 길에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고통을 좀더 쉽게 견딜 수 있게 해주지는 않는다. 마치 사막 길을 걸을 때 오아시스가 있다는 지식이 사막의 열기를 막아주거나 견디기 쉽게 해주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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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歸天

         오늘 같이 청명한 날, 歸天하시는 분들은 천상병 시인처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침 성무일도의 찬미가에서처럼 태양이 본모습을 드러낼 때면,...
    Date2018.05.19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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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캐치프레이즈

    벌써 40 여 년 전의 일이 되었다. 광주에서 성소 workshop을 한 것이! 그 무렵 나는 스스로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좌우명으로 삼았었다. “생긴 대로 살자” 하느님은 쓰레기를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남 흉내 내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나로서 살자는 취지였다....
    Date2018.05.18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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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心身一如”

    장맛비처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근 열흘 만에 우이령을 오르다. 비에 씻겨 선명히 초록으로 빛나는 온 산에 비 내리는 소리, 계곡의 물소리 가득하다. 나뭇가지들이 뻗고 나뭇잎들도 잔뜩 부풀어 우이령 길이 좁아졌다.   1차 세계대전때 파리방어 사령관...
    Date2018.05.17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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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울릴 수 있을때 종을 쳐라!

    라틴어로 Lacuna는 웅덩이, 구덩이, 함정을 뜻한다. 그럴 수 있다면 가끔 삶의 어떤 구간을 삭제하여 빈틈으로 만들고 싶기도 하다. 그런 빈틈이 많을수록 존재감은 없겠지만....   인간의 전존재중 가장 내밀한 인격적 차원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는 “영” 이...
    Date2018.05.16 Category복음 사색 By후박나무 Views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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