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편이 있어 삽존리 수도원을 방문하고 주문진의 솔 이도 보고 오다. 솔 이는 이제 온전히 안정되어 만족하게 지내는 듯 보인다. 내가 다하지 못한 책임을 대신 져주는 사람들이 있어 솔 이에게도 나에게도 다행이다.
유대인들은 야훼께서 가나안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하고, 아랍인들은 야훼 하느님께서 언제부터 ‘부동산 중개업’을 하셨느냐고 비아냥거린다.
아브라함은 야훼 하느님이 가나안땅을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현실적으로 그가 해야할 일을 면제시키지는 않는다. 아브라함은 현명하게도 땅의 주인이 거저 주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애써 땅값을 지불한다. 먼 훗날 그의 후손들이 온 가나안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교두보라 할 만한 땅을 확보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햇사람 에브론 에게 은 사백 세겔을 주고 마므레 동쪽 막벨라에 있는 밭과 거기에 딸린 동굴과 사방 언저리에 있는 모든 나무와 함께 성문에 모인 햇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브라함의 땅이 되었다.” 남의 땅에 몸 붙여 사는 이방인으로서 의심을 받지 않게 땅을 사는 이유도, 부인 사라의 묘지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냐시오 성인이 하셨다는 말씀과 오늘 창세기의 이야기는 맥을 같이한다. 기도할 때는 하느님만 계신 듯이, 현실에서 일할 때는 하느님 없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