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혹은 “무엇을 찾느냐?” 란 물음에 가장 궁극적인 답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가 아닐까? 그리고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이 원(願)을 이루려는 실천의 결과이다.
지금 여기의 세상과 있어야 할 세상 사이엔 간극이 있게 마련이고, 그 갭은 누구의 희생으로서만 채워지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그것이 개인이든 가정공동체 혹은 국가든.
“여우도 굴이 있고 제비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사와도, 내게는 당신의 제단이 있나이다.” 요한은 일찍이 예수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 양’ 임을 갈파했다. 많은 이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제물이 될 어린 양으로…….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의 불화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그 고통과 고통을 초래한 죄를 형상화한 구리 뱀을 바라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단서는 루카 고유의, 골고다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에 달린 세 사람의 이야기에 있다. 구리 뱀을 바라 본 사람과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루카가 전하는 대화와 비슷한 자기와의 대화를 할 것 같다.
돌아가신 박 도세 신부님이 즐겨 하시던 성가 491장을 오늘 입당성가로 선택했다, 만민들아 오너라 십자가 아래로……. 왜 그러셨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