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日是好日

조회 수 441 추천 수 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장미주일이다. 엊그제 강릉에서 보내온 ‘솔이’ 이야기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마음을 에이게 한다. 저녁때가 되어 문득 솔이가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집 안팎을 찾았더니, 이 녀석이 평소에는 쓰지 않는 방에 들어가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더란다. 그 방은 내가 솔이를 보러 가게 되면 잠시 머무는 곳이다. 녀석도 가끔씩 그리움이라든가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나보다.

 

오늘 대림 3주 장미주일의 이사야서 독서는 3~4년전 많이 읽혔던 “리스본행 야간열차” 에 인용된 페소아의 문장을 다시 음미하게 한다.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 제 2 이사야가 제2의 엑서더스라 명명하기 까지 하며 개선장군처럼 찬란하고 위풍당당한 귀환을 노래하였지만, 페소아의 통찰을 담은 위의 문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제국의 수도로 끌려간 사회지도층의 사람들 중의 극히 일부만이 본토로 귀환하였을 뿐더러, 남녘땅 시냇물처럼 돌아 오리라던 그 행렬은 초라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바빌론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졌노라” 하며 노래하는 것과 나름대로 제국의 수도에 뿌리를 내려 비교적 안정을 찾은 삶을 버리고 다시금 역이민에 나서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실재이다. ‘야간열차’ 에서는 이런 문장이 보인다.

 

_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이상하고 묘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서야 깨어 있다는 느낌,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빌로니아에 점령당해 제국의 수도로 끌려갔던 유다 지배계층의 별 볼일 없는 귀환처럼, 모세의 엑서더스 또한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불타는 떨기나무는 많았으나 모세만이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파킨슨 증상의 하나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사람은 꿈, 비전이 있어야 멸망하지 않고 사는 법인데 잠을 자지 못하니 꿈도 꾸지 못한다. 아마도 이것이 불면증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해악일거다. 잠에 관한 한 내가 할 일은 잠이 오도록 환경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오늘이 그 날이며 지금이 그 때라고 하느님은 끊임없이 돌아오고 계신다. 전례력의 성탄절 같이 무슨 특출한 사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일상으로 오신다. 파도타기처럼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를 알아차리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몸을 던지는 것이다.

 

_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이런 생각은 술 취한 저널리스트와 요란하게 눈길을 끌려는 영화제작자, 혹은 머리에 황색 기사 정도만 들어 있는 작가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동화일 뿐이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

 

 

  1.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

    Date2019.12.15 By후박나무 Views441
    Read More
  2. 기초연금

    Date2019.12.09 By후박나무 Views226
    Read More
  3. '먹방'

    Date2019.12.05 By후박나무 Views280
    Read More
  4. 대림절

    Date2019.12.01 By후박나무 Views249
    Read More
  5. Dukkha(둑카- 고, 불안정)

    Date2019.12.01 By후박나무 Views221
    Read More
  6. 좌도(左盜)와 우도(右盜)

    Date2019.11.24 By후박나무 Views202
    Read More
  7. 생긴대로

    Date2019.11.20 By후박나무 Views215
    Read More
  8. 자캐오-jnanic

    Date2019.11.19 By후박나무 Views157
    Read More
  9.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Date2019.11.14 By후박나무 Views293
    Read More
  10. Novena 마지막 날!

    Date2019.11.10 By후박나무 Views202
    Read More
  11. 抱神以靜(포신이정)

    Date2019.11.07 By후박나무 Views324
    Read More
  12. "너희는 멈추고 나를 알라!"

    Date2019.11.03 By후박나무 Views365
    Read More
  13. 악연(惡緣)과 가연(佳緣)

    Date2019.11.02 By후박나무 Views225
    Read More
  14.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 달!

    Date2019.11.01 By후박나무 Views193
    Read More
  15. 年年歲歲花相似(년년세세화상사)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

    Date2019.10.31 By후박나무 Views651
    Read More
  16. 요한 23세

    Date2019.10.29 By후박나무 Views214
    Read More
  17. 다시 '서울의 봄'

    Date2019.10.26 By후박나무 Views304
    Read More
  18. 수도회 창립자 대축일 및 박도세 신부님 기일!

    Date2019.10.19 By후박나무 Views48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Nex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