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日是好日

2020.04.26 09:04

엠마오

조회 수 287 추천 수 1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록 중간에 한 번 깨어 딴 짓을 하다 잤어도 어젯밤같이 숙면을 취한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10시쯤 자리에 들어 4시 반까지 푹 자다. 언제나 눈이 뻑뻑하고 충혈 되었었는데 오늘은 맑다. 오관이 성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수면보조 영양제가 도움이 되기는 하나보다. 여세를 몰아 우이령까지 다녀오다. 산에는 산 벚꽃 지고 철쭉과 복사꽃이 한창이다. 이제 곧 라일락 향기 속에 영산홍이 피어나겠지. 라일락 향은 중 1때 처음 마음 깊이 느꼈던 안도감의 배경이다. 라일락꽃 활짝 피어 온 집에 향이 진동하던 날 저녁 우리 형제들이 모인자리에서, 더 이상 그 학대를 받지 않아도 됨에 깊은 안도의 한 숨을 쉬던 나를 잘 기억한다. 아마 그 사람이 우리 집안에 들어온 4살 때 이후 억압과 긴장 속에 살다가, 처음 가져 본 새로운 느낌, 안도감이다. 매일매일 매 순간이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으니까!

 

좋은 계절이라는 봄은 이렇게 잔인하다면 잔인한 기억으로 물들어있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니 잔인한 기억은 다시 근사한 연기(緣起)의 시작이 되리라.

 

복음서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마르코 복음의 짜임새를 보면, 먼저 수난사화가 있었고 그 수난사화에 이르는 과정을 써서 합본을 만든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 들에게는 자신들이 메시아로 여기던 그 분이 그렇게 무력하고 참혹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신들이 부여하던 의미마저도 산산조각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은 예수가 죽은 후 어떤 형태로 또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체험되었는가를 서술하지 않고 예수를 안치했던 동굴이 비어있었다고, ‘빈 무덤’ 만 보고한다. 이제 예수의 체험은 각자에게 열려있다고.

 

제자들은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예수를 체험하여 나름대로 기록하였다. 복음사가중 사회의식은 물론 문학적 재능 면에서도 제일 탁월했던 루카는 돌아가신 예수를 살아있는 분으로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엠마오라는 이야기를 통해 설파하는 것 같다. 엠마오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진실 되기 때문이다.”

 

엠마오 이야기는 동방정교회의 영성인 필로칼리아를 일반인들이 알기쉽고 실천하기 쉽게 소설형식으로 소개한 “이름없는 순례자의 기도” 란 책에 비길 수 있다. Philosophia 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듯이, Philokalia 는 정적, 고요에 대한 사랑이란 뜻이다. 희랍, 러시아 정교회에서 크게 성행한 이 영성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로 잘 알려져있다. 필로칼리아는 그 깊은 영성을 집대성한 문헌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방대하므로 일반 교우들이 접근하기는 무리다. 이럴 때 이 필로칼리아의 방대한 내용과 그 접근방법등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소설형식으로 쓴 “이름없는 순례자의 기도” 는 얼마나 동방교회의 영성에 기여했던가!

 

엠마오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 각자가 처한 실의와 좌절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곱씹으며 이해하고자 해야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도움이 될법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문제를 개방한다. 이런 열린 마음은 스스로가 갇혀있던 좁은 감옥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마음을 나눈 낯선 이들과 가진 것도 나누게 되며 이때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 예수는 부활하여 인간 사이에 이러한 관계를 진작시켜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한다.

 

 

  1. 듣는 마음

    Date2020.07.25 By후박나무 Views184
    Read More
  2. “아침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Date2020.07.21 By후박나무 Views242
    Read More
  3. 남설악의 등선대

    Date2020.07.19 By후박나무 Views161
    Read More
  4.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 “No one steps twice into the same river”)

    Date2020.07.16 By후박나무 Views360
    Read More
  5. 인륜지대사 (人倫之大事)

    Date2020.07.14 By후박나무 Views228
    Read More
  6. Redemption

    Date2020.07.07 By후박나무 Views255
    Read More
  7. 김호중의 산노을

    Date2020.06.29 By후박나무 Views463
    Read More
  8. 기억속의 갈릴레아

    Date2020.06.28 By후박나무 Views157
    Read More
  9. Niente di nuovo sotto il Sole!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Date2020.06.24 By후박나무 Views214
    Read More
  10. 빈 수레

    Date2020.06.18 By후박나무 Views186
    Read More
  11. 성체와 성혈

    Date2020.06.16 By후박나무 Views227
    Read More
  12. 욥기

    Date2020.06.02 By후박나무 Views189
    Read More
  13.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Date2020.05.27 By후박나무 Views506
    Read More
  14.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Date2020.05.25 By후박나무 Views1241
    Read More
  15. 종말 OR 새 시대의 도래!

    Date2020.05.21 By후박나무 Views305
    Read More
  16. '서로 사랑하라'

    Date2020.05.16 By후박나무 Views205
    Read More
  17. 빗소리!

    Date2020.05.13 By후박나무 Views226
    Read More
  18. 시대의 징표

    Date2020.05.02 By후박나무 Views130
    Read More
  19. 엠마오

    Date2020.04.26 By후박나무 Views287
    Read More
  20. 성.금요일

    Date2020.04.10 By후박나무 Views170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Nex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