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희(朱熹)의 우성(偶成)이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인용한 시구는 인생은 짧은데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경계를 하지만, 막상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음을 체험하면 또 다른 감회를 갖게 된다. 보통 이런 자각은 자신이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의식과 같이 온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이제껏 살아오면서 자신은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열매’ 로 번역된 ‘카르폰’ 은 ‘카르포스 KapπÓS ’ 의 단수 목적격인데, 나무의 열매라든지 자손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영적인 영역에서의 ‘결실기 ‘산물’ 이라는 의미로도 종종 쓰였다. 물론 이때의 돌아보기는 대부분 헛살았다 는 쓸쓸함이나 허망함을 진하게 남긴다. 그 삶이 생명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것 에 국한됬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전후맥락상 위치를 살펴보면 그리스인들이 예수의 제자를 통해 예수님을 뵙고싶다는 청과 그에 대한 예수의 동문서답식 긴대답의 일부이다. 이 단락은 마리아가 예수의 장례를 위하여 미리 향유를 바르고, 예수는 라자로를 부활시키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등, 바로 민중들이 메시아에 대해 기대하던 것의 성취였으며 예수 당신의 생애에서도 외적인 성취로 볼 때 정점에 이르렀을 때이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만찬과 고난뿐인 시점(視點)이다. 바로 그때 일단의 그리스인들이 예수 만나기를 청한다. 제자들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청을 들은 예수는 언뜻 보기에는 동문서답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당신 제자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하나의 도전이다. 예수가 잘 나갈 때 예수를 따르는 일은 쉽다. 그러나 진정 예수를 따르는 일은 많은 고난이 따른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야훼의 넷째 종의 노래가 이해될 때 진정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고 예수를 따르게 된다. 진정 마귀를 쫒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칭송만 받는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