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이 죽음을 격지 않고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과연 무슨뜻일까? 인간성을 그대로 간직하고서도 천상에 오를 수 있다 함은, 아무리 비참한 처지에 인간이 빠질지라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는 것일게다.
1992년 부활절 휴가 때 나는 폴란드의 바르샤바 고난회 수도원에 있었다. 그 당시 폴란드는 아직 공산당 치하에 있었으므로 가톨릭과 또 바웬사로 대표되는 민주세력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순절 기간이기도 했거니와 아직 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이전의 폴란드 교회였기에 금요일의 십자가의 길 같은 신심행사에는 교회가 가득 찼었다.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서 유고슬라비아를 다시 경유해야했기에 하루는 날을 잡아 폴란드 신학생들의 안내로 영사관에 가 비자발급도 받고 폴란드의 유명한 ‘검은 성모’ 님이 계신 야스고나라 수도원을 순례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활절 기간이라 우리나라와 같은 따뜻한 봄 날씨를 예상했던 나는 추위에 고생 좀 했다. 얼마나 춥던지 머리가 얼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인체의 컴퓨터인 머리가 추위에 약함을 나는 그때 알았다. 왜 북쪽지역의 사람들이 털모자나 모피 모자를 꼭 쓰고 다니는지 알게 되었다. 컴퓨터 같은 섬세한 기계들은 온도나 습도의 변화에 민감하여 작동을 멈출 때가 많다. 버스정거장은 비교적 넓은 인도에 있었는데 차도의 반대쪽엔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인도에서 주택으로 들어가려면 각 집마다 계단이 있어 경계선이 되었다.
나는 추워서 머리도 멍한 상태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적잖은 숫자의 노숙자들이 그런 계단을 바람막이 삼아 웅크리고 맨 땅에 앉아 있었다. 폴란드 신학생들은 그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난민들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중년의 아주머니도 계셨는데 그들의 막막한 심정이 나에게도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막니피깟이 노래하듯 그분께서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듯이. 그 추위에 맨땅에 앉아 계단을 바람막이삼아 기대어 있던 한 아주머니의 얼굴이 일순간 계시처럼 빛을 발하며 Prima Donna 못지 않게 환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미소가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막니피깟의 말씀이 현실화 되는것을 목도했다. 그 미소는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이었다. 아마 무릎에 거적으로 덮어놓은 아기가 엄마를 보고 재롱이라도 보였나보다.
성모승천축일은 이런 뜻이 아닐까? 지상에서 낙원으로나 시간에서 영원으로처럼 도저히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감히 바라지도 못하던 상황으로 옮겨가는 것. 사실 신앙인의 삶은 이런 일의 연속이어야 한다.
지금으로 부터 꼭 40년 전 오늘 나는 공식적으로 예수고난회의 지원자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40년이란 세월은,고집세고 목덜미가 뻣뻣하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헤맨 기간과 꼭 같다. 과연 지난 40 년이란 시간은 광야에서 헤맨 시간이었을까? 그랬더라도 정화의 시간이었다면 좋겠다.
죠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 가 그 유명한 긍정 “모두가 다 은총이지” 라는 말로 끝나듯 자신의 수도생활을 나름 인정하고 수용하니 ‘웨딩 드레스’ 라는 노래의 가사가 낯설지 않다.
https://youtu.be/Or3HSH3-Z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