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권학시 우성의 마지막 부분같이 [계전오엽 이추성(階前梧葉 已秋聲) - 섬돌앞 오동나무는 벌써 가을을 알리네], 보통 오동잎이 가을을 제일 먼저 알린다고 하지만, 우이 령에서는 벚나무 잎이 그러하다. 지금도 붉게 물든 벚나무 잎이 비바람에 날린다. 어제부터 날씨 영향인지 많이 아프다. 이럴 때는 무엇을 해도 아프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다. 알코올환자의 기도가 이럴 때도 유용하다.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용기를 주시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평온히 받아들이게 해주소서.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소서!
예수고난회의 성소모임에서 처음 보았던 아주 낡은 필름이 하나 생각난다. 더불어 이 필름을 보기 전에 전(前)이해(理解)를 위해 진지한 표정으로 몇 마디 하시던 박 도세 신부님도……. 아래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계단이 여러 개 위로 솟구쳐 있다. 한 신사가 위로 오르는 계단 사이를 배회하며 어느 것을 택해 오를 것인지 고민한다. 드디어 하나를 선택하고는 오르기 시작한다. 힘차게 오르기 시작했던 청년신사는 점차 오르는 속도가 완만해진다. 이제 중년이 된 그 신사 여전히 오른다, 현저히 천천히…….
마침내 노인이 된 그가 오르던 계단위에 쓰러진다. 쓰러져서라도 한 단계 더 오르려는 노인은 마지막 계단까지 오른 뒤 그 위에 쓰러져 한 계단을 높이며 마지막 계단이 된다. 누군가 또 이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다시 마지막 계단에 하나를 더 얹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놓음으로서……. 이런 이미지는 정호승의 봄길이 빚어내는 심상과 흡사하다. 길은 그렇게 나는 것임을!
봄길
정호승 / 시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