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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09:38

저희가 무엇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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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이 글라라 (광주)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론 너무 마음이 아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도와주었을 뿐인데···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빵을 나누어 먹고 있는데 경비병들이 와서 나를 잡아가더니

많은 군중 앞에 세우고는 내게 사형선고를 내렸지.

난 힘없고 나약한 몸,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서 십자가를 지고서 골고타를 향해 걸었어.

그러다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지. 매질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내 머리에 박힌 가시관 때문에 피가 흘러 눈앞은 잘 보이지도 않았어.

또 십자나무는 왜 그리 무거운지,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길은 내게 너무 힘이 들었어.

 

힘겹게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는데

저기 멀리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았지.

바로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어찌할 줄 모른 체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수건을 입에 물고 몸부림치고 있었어.

내가 당신의 우는 모습을 보면 약해질까 봐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 내 다리가 휘청거렸어.

리 없는 몸부림으로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차마 난 볼 수가 없었어.

그때 처음으로 나의 아버지,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어.

나의 수난과 죽음이야 당신의 세상 구원 사업을 위한 도구라 하더라도

아픔과 고통으로 녹아버릴 것만 같은

내 어머니를 보는 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거든.

 

그때 길가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사람이 와서

조용히 내 십자가를 함께 지는 거야.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도 그 사람은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못 이겨서 휘청거렸다고 생각했나봐.

모두가 나를 욕하고, 행여 내가 아는 체 할까봐 피하고 멀리하고,

심지어 내 제자들도 모두 다 도망을 갔는데

내 곁으로 와서는 십자가를 함께 들어주다니.

너무도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무슨 화라도 입을까 걱정도 되었어.

그렇게 또 한참을 가는데 이번에는 한 여인이 다가와

내 얼굴을 닦아주었어.

내 얼굴은 피와 땀뿐만 아니라

나를 모욕하며 야유하는 사람들이 던진 온갖 오물들로 범벅돼있었거든.

그 더러운 것들을 베로니카가 닦아주었지.

난 기억해.

나의 얼굴을 닦아줄 때 바르르 떨던 베로니카의 손,

나를 바라보던 고통과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모르는 그 눈길을.

 

그렇게 골고타로 가는 사이 난 두 번째, 세 번째 넘어졌어.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지.

세 번째 넘어질 때는 정말 다시는 못 일어나겠더라고.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었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없었지.

나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고 나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거든.

그래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 아버지가 사랑하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내 아버지는 말씀하셨어.

난 전능하신 나의 아버지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기에

죽음까지도 그분의 말씀대로 하고 싶었어.

아니 해야 했어.

그것이 내가 세상에 온 이유거든.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 드디어 골고타에 도착했지.

그곳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나의 옷을 벗기고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

드디어 나의 죽음의 때가 왔음을 알았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죽음의 때가 점점 가까워지자 오히려 난 마음이 편안해졌어.

사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렸을 때의 고통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극도의 고통이었지.

그러나 마음만은 편안했던 것은 아버지께서 명하신

나의 역할을 드디어 완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

오히려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이었지.

 

내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6,39)라고 말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던 백인대장의 믿음의 말을 듣고,

드디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난 알 수 있었지.

사실 나도 두려웠어.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었지.

아버지께 사정도 해 봤어.

‘아버지, 이 십자나무 안지면 안 되나요? 거두어 가시면 안 되나요?’

그러나 소용없는 것도 알지.

나의 아버지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나를 구세주 그리스도로 세상에 보내셨는데 십자나무를 버리면 안 될 일이지.

행여 내가 행했던 기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날까

숨어 다닌 것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어.

그것으로 나의 아버지 하느님을 증거하고,

내가 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어.

나의 죽음은 그런 나의 아버지 뜻이 드디어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야.

“다 이루어졌다.”(요한 9,30)

 

그러니 나를 돌무덤에 묻어놓고 슬퍼만 하고 있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무 슬퍼 말거라.

나는 비록 너희와 같은 공간에서 먹고, 마시고,

숨 쉴 수는 없지만 늘 너희와 함께 있노라.

이제 슬픔보다는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주었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이다.

이제 슬픔보다는 나를 증거 하는 삶으로 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주길 바란다.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힘없는 이에게 사랑과 자선을 나누어주길 바란다.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의 내 죽음의 의미이며,

너희가 나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부활을 함께 사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구원자 나의 예수님

십자나무를 지고 골고타를 오른 당신을 생각합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신 당신을 기억합니다.

저희가 무엇이기에 그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무엇이기에 십자가 죽음을 택하십니까.

나의 예수님!

당신의 수난 너머에는 영광이 있고

당신의 죽음 너머에는 부활이 있음을 알기에

저희도 당신 닮은 모습으로 저희 자신을 죽이고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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