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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프란치스코  (서울 )

 

해외성지순례는 아직 가보지 못했고 국내 성지순례는 기억을 끄집어내어 글쓰기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최근 양양오상영성원에 갔던 피정길이 순례길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글쓰기 숙제를 해 본다. 침묵피정 후의 서울 가는 버스를 타기 전 두어 시간에 양양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에 무얼 할까 망설이다 머리를 깎기로 하였다. 서울 아파트 상가의 미용실은 장사가 잘되어 붐비는 데 이곳 이발소는 안 될 게 뻔하니 지방경제 활성화에 모래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어 보자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우며 당당히 이발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발소 주인은 사흘 전 감자 칼국수 식당의 아주머니처럼 멀뚱하게 나를 쳐다보고만 있는데 할 얘기가 없어 “대금이 얼마입니까” 하고 물었다. 주인은 대답 대신 요금표를 보라고 했다. 속으로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생각하였지만 요금표를 보니 그냥 이발만 하는 것과 면도를 포함하는 것, 또는 염색을 추가할 때의 가격이 각각 다르니 말하기가 귀찮았겠다고 이해했다. 어쩌면 그의 태도가 외지인을 낯설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하여간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하니 앉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머리의 뒤나 옆을 얼마나 치면 되느냐고 묻기에 완전히 치지는 말고 많이도 아니고 적게도 아니고 적당히 치라고 설명하는 데 힘이 들었다. 윗머리를 싹둑 자르며 이만큼이면 되느냐고 해서 난 사실 눈이 하도 나빠 안경을 안 쓰고는 잘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좀 지나서 뒤와 옆을 치더니 안경을 쓰고 한번 보라고 안경을 건네주질 않는가. 주인을 본 후 처음 받는 친절이었다. 너무 짧은 느낌은 있었지만 좀 지나면 자랄 것이고 주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아, 잘됐네요.”하며 칭찬까지 해 주었다. 역시 ‘오는 친절에 가는 친절’이다. 아까 이발소 문을 들어서며 했던 나의 행동도 문득 후회되었다. 아무리 주인이 무덤덤해 보이더라도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네지 못한 것이다. 나의 피정 목표가 ‘주님께 가까이’이었고 피정에서 묵은 방의 이름도 ‘친절’이었는데 피정 끝나고 불과 몇 시간에 이웃에게 친절한 말도 못 건넨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이발을 마치고 머리를 감기는 데 주인의 손길이 시원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고 머리 말리는 데 수건을 초스피드로 앞뒤 왕복하는 숙련된 기술을 보니 어릴 적 동네 이발소 주인의 기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점원이나 전화안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표면의 친절 속에 숨겨진 거리감보다는 이발소 주인처럼 겉으로는 불친절한 듯해 보이더라도 몸으로 그 살뜰한 친절의 내용이 느껴지면 그게 참 친절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발을 마치고 뭐 좀 더 보고 살 것이 없을까 하여 재래시장을 찾아 가는 길에 호떡집이 눈에 들어 왔다. 시골 순이처럼 생긴 둥글이 처녀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반죽 일을 하고 둥글이는 호떡을 뒤집으며 손님을 상냥한 서울 말씨로 대해 주었다. 그 상냥함과 독특한 맛에다가 하나에 육백 원하는 싼 호떡 값에 마음이 움직여 오백 원짜리 어묵을 하나 더 먹을까 했는데 배가 불러 참기로 하였다. 손님에 대한 친절이 결국은 그들의 수입과도 관련이 없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의 재래시장을 찾아갔는데 좀 들어가 보니 각각 오천 원씩 하는 달래랑 냉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양이 너무 많아 들고 가기가 귀찮아 포기하고 일단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걷다 보니 각각 반씩 오천 원에 한 봉지 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그 노점에 다시 돌아왔다. 반갑게도 반씩 살 수 있게 되어서 기분 좋게 사고 돌아서는데 “사 줘서 고맙습니다.”는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작은 인사도 놓치지 않는 또 다른 둥글이 처녀 아이의 마음이 곱게 다가왔다.

 

시장길을 다시 두리번두리번 걷다가 건어물 상회에 조미된 건조 아귀포가 눈에 띄어 멈칫하다가 중년 아주머니의 친절한 몸짓과 말씨에 하나 사게 되었다. 다음에 또 오시라고 하기에 서울 사람인데 또 오겠냐 했더니 그래도 또 오라고 상냥히 말하였다. 이분이야 말로 양양에서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친절한 분이 아닐까 생각하였었는데, 서울 와 맛을 보니 너무 달고 짠 데다 중국산이어서 ‘겉으로 나타나는 친절보다는 내용이 중요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승차 시간이 다가와 터미널 쪽으로 가다가 양양에서 제일 잘하는 빵집이라는 광고에 호기심이 들어 들어가 보았다. 팥빵, 크림빵, 소보로, 마드렌느, 애플파이 그리고 스콘, 합해서 칠천사백원이 너무 싸서 호기심에 사 보았다. 빵집 아저씨가 차 한 잔 하시라는 의외의 친절에 감동하였지만 차 시간이 다가와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빵집을 나왔다. 서울 와서 빵덕후 아내의 품평을 보니 매우 좋다. 그렇다면 겉의 친절과 속의 내용까지 좋았던 빵집아저씨가 양양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중 최고의 친절상 감이 아닐까 싶었다.

 

내친김에 친절상 수상식을 갖기로 한다. 최우수 친절상은 빵집 아저씨, 우수상은 이발소 아저씨 그리고 장려상은 호떡집 아가씨와 냉이와 달래를 팔던 아가씨가 공동 수상이고 건어물상회 아주머니는 포토제닉상으로 모두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였다. 또한 글쓰기에 고생하고 있는 나에게는 감투상을 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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