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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22:31

그녀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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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마리아(서울)

1년 7개월 만에 다시 찾은 배론골 피정의 집. 춥기로 유명한 제천 산골이어서인가. 

4월 중순인데도 아직 봄이 채 안 왔다.

아직 통통한 꽃망울 속 벚꽃. 간신히 진달래와 산수유가 수줍게 피어있을 뿐이었다.

많이 변했구나. 그립던 그 집엔 그녀도, 호젓한 오솔길도 없어졌다.

그녀 대신 맘 좋은 노부부가, 오솔길엔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익숙함 속의 또 다른 낯섦.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이, 얼마나 변했을까.

 

간단하게 짐을 부리고 성목요일 예식을 위해 마당 건너 수녀원 성당을 찾았다.이곳만은 변함없는 그 모습.

창살너머 아기 수녀님도 아직 막내티를 못 벗고 여전히 앳된 모습으로 계신다.

모든 것이 어제같이 느껴진다.

성목요일 예식이 끝나면서, 아름답게 장식한 촛불들이 밝혀지고 수난감실 경배가 시작된다. 밤새...

수녀원에서 밤새 성당 문을 열어놓는 일 년에 한번뿐인 성목요일 밤.

그저 감사 속에 자다 깨다 반복하며 머문다. 성금요일 3시 수난예절.

감실은 비워지고 촛불 역시 치워져, 아기자기하던 성전이 썰렁해진다.

성토요일. 근처에 있다는 용소막성당을 찾았다.

성전청소가 한창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성체조배실로 향했다.

색다르게 바위 속에 꾸며진 조배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포근한 황토방 움막 같다.

용기 내어 실내등을 껐다.

깜깜한 적막이 펼쳐질지 알았는데, 천장에 뚫린 채광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며 제대를 비춘다.

감실은 비어있다. 그야말로 바위 속 빈 무덤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계획한 것도 아닌데, 성토요일 바위 속 조배실에 앉아 빈 무덤을 체험할 수 있음이 한량없는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성야미사를 마친 그 밤에, 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부활 선물 그 자체였다.

밤새 마술처럼, 수녀님들의 손길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에서 봉헌한 부활미사를 끝으로 성삼일 피정을 마쳤다.

 

두해 전 가을 끝자락. 문득 혼자 머물고 싶은 간절함에 찾은 산골 피정집.

그날의 저녁 밥상을 잊을 수가 없다.

월요일은 쉬는 날이기에 일요일 오후엔 피정자를 들이지 않음에도 기꺼이 나를 받아준 그녀.

당연히 피정자가 나 혼자였기에 미안해서 저녁밥은 안 차려도 된다 하였건만, 정성스런 밥상이 나를 반겨주었다.

사각 접시 위에 먹음직스런 돈가스, 정갈한 반찬. 따뜻한 밥.

소박하지만 황홀한 밥상이었다, 아름다웠다. 감격스러웠다.

결혼 후 산후조리 때 빼고 언제 이렇게 혼자 독상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밥상. 그 사실만으로도 황홀했다.

나 홀로 피정은 그렇게 따뜻한 환대 속에 시작되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활발한 여인이었다.

가녀린 몸에, 손에 물이 마를 날 없어 피부가 상할 대로 상한 채 고생하면서 피정집의 살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신심이 깊어 건너편 수녀원에서 하는 새벽미사 제대봉사를 하고는,

아침식사 준비 때문에 시간경을 못하고 일어나야 함을 매우 아쉬워하곤 했다.

3박4일 머무는 동안 신부님과 다른 피정자들과 함께하는 밥상머리에서,

하나씩 풀어놓는 그녀의 살아온 삶의 모습에 동생 같은 애잔함을 느꼈다.

지금은 피정집에서 순례자들을 돌보고 있지만,

자신 또한 그곳에서 긴 피정을 하는 순례자라며,

주님께서 떠나라 하시면 또 어디론가 떠나 그곳에서 새로운 순례를 할 거라 하던 그녀.

꼭 다시 들르라는 당부에 고작 한해를 거르고 찾았는데,

그녀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인생의 순례를 떠나고 없다.

분명 처음 방문 땐 혼자 산책하고 뒹굴던 내 맘, 내 멋대로 피정이었고,

이번엔 수녀원 성삼일 전례에 맞춰 규모 있게 잘 보냈음에도 피정 후 마음이 헛헛한 건 괜한 미안함 때문인가.

그날의 밥상에서 느꼈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서인가.

그녀의 빈자리가 괜히 나를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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