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연극이나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와 후반부의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보면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세 번째 발현하신 예수님이 등장하기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름을 느낍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로 인한 밤과 아침, 어둠과 밝음, 낙담과 기쁨, 텅빔과 충만을 다양한 색깔로 연출하고 특히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나눈 <대화 내용>은 그 상황에 맞는 긴장감과 함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으로 되돌아와서 무료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일터로 돌아온 사도들의 내외적 분위기는 밤 새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낙담과 실망으로 어둔 기운이 넘쳐납니다. 이 실망과 낙담의 어둔 기운은 허무함의 짙은 밤의 어둠과 함께 무겁게 사도들의 지친 어깨를 짓누르며 이중으로 휘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아침, 새날의 아침이 밝아오는 그 때 호숫가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자신들의 무력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낙담과 실망을 알아차리시고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Jn21,5)고 하시자, 그들은 <못 잡았습니다.>라고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를 답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21,6)고, 그러자 그들은 그물을 던졌고 예상하지 않게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일할 때 <충만함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제자들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의 순간은 제자들의 배신과 배반 그리고 도망침을 묻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와서 아침을 먹어라.>(21,12)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초대의 순간입니다. 이 말씀 곧 <와서 아침을 먹어라.>는 말씀은 자신들의 죄책감과 자기 환멸의 갇힘에서 이끌어 내시고 용서하심을 통해 떠나시기 전날 밤의 사랑과 섬김의 마지막 만찬의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아무도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 순간의 은혜로움을 묘사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이 초대에는 우리 역시도 예외가 아니며,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부활의 새 아침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을 다시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듯이 무려 장정만도 오천 명 가량이나 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 지도자들이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사4,7)라고 추궁받자 용감하게 증언합니다. 자신들의 하는 모든 일은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4,10)고 당당히 밝힌 그 원동력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새롭게 거듭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