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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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묵은 상자를 정리하면서, 몇 년도에 강의하였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2000년도 초반에 했던, 명동성당에서 사순절 특강 강의록 프린트물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를 수정하지 않고, 입력해서 사순시기를 살아가시는 분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보내드립니다. 아침 전체를 보냈더니 긴 강의록이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에 부득불 1부와 2부로 나눠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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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성당 사순절 특강 3월 3일(=강의 날자로 판단해서 같은 날에 보냅니다.)   
                           
그 길에서.....

지난 1월 25일 사도 바오로 개종 축일 전후에 저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독일의 유명한 코메디언인 하페 케르켈링이 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입니다. 저도 남부럽지 않게 많은 여행을 해 본 사람이기에, 여행의 의미를 나름대로 알고 있지요. 여행이란 그 출발 시간과 장소는 각기 다르다 하더라도,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고 본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페의 체험이 제게도 전달되어 왔답니다. 그리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사도 바오로의 체험과 겹치면서 <길>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강렬하게 제게 다가왔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의 길에서,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났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적인 회심이나 개종이라는 피상적인 결과보다는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뿌리인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그분의 비추심과 이끄심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고,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귀의하며,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고 고백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페 역시 그 길, 야고보 길에서 자신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의심과 불안 속에 그는 홀로 600km의 고독한 야고보 길에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이며, 하느님은 참으로 존재하는가? 존재하신다면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질문하면서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았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오로가 걸었던 다마스커스의 길도, 하페가 걸었던 야고보의 길도 단지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의 길일뿐입니다.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 수만의 길이 존재합니다. 바오로의 다마스커스 길은 분명 앞선 길이고 하페의 야고보 길은 분명 늦은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집고 넘어야 할 사실은, 바오로도 하페도 그리고 우리 역시 분명 예수님 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오기에 당연히 예수를 만나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오시어 예수님을 바른 빛으로 보고 알 수 있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 아오스딩은 <너희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야고보 길에서 하페가 던진 질문은 야고보 길을 순례하는 사람은 물론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문은 오직 한 가지 질문으로 집약된다고 봅니다. <나는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간의 모든 인생길은 저마다 자신을 찾아 나서는 길이고 하느님을 찾아 만나는 길입니다.

2002년 10월 광주에서 개최된 예수고난회 전 세계 관구장 회의(=시노드) 중간에 참석한 모든 신부님들을 안내하여 순천 송광사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저희 일행을 안내해 주셨던 분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스님이셨습니다. 그 스님은 불교의 양성과정을 설명하면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한마디로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을 듣던 저희 일행 가운데 어느 신부님이 덧붙여서 말씀하시기를 저희 가톨릭의 오랜 영성 전통은 끊임없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왔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본질과 실체의 다름이 아니라 같음의 다른 시선이요 다른 접근일 뿐임을 그때 새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향해 던진 질문 <너 어디에 있느냐?>의 바탕에는 하느님 앞에 서 있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러시아 시인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는 하느님을 향하고 있거나 돌아서 있을 수는 있지만, 하느님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 아오스딩은 오랜 방황 체험을 통해서 <주님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소서. 그러므로 제가 누구인지 알겠나이다.>라고 고백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됩니다.     

구원사의 첫 걸음을 떼신 아브라함으로부터 오늘 우리 자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는 저 마다의 인생의 길에서 자신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러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브라람은 우르에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길, 특별히 모리야 산에 이르는 길을 통해서, 모세는 이집트에서 미디안으로 미디안에서 이집트로 되돌아감으로 그리고 이집트에서             느보산에 이르는 길을 걸으면서,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호렙산으로 물러나면서, 사도들은 카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스승과 동행하는 길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의 도상에서, 하페는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성지 순례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인생길을 통해서 자신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러 지금도 계속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마다 길을 떠난 출발 시간과 장소가 전적으로 다르지만, 그 지향점은 바로 생명이신 하느님이시며, 그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 파스카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은 바로 거짓된 길(邪道)로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길을 걸으면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다.>고 한 파스칼의 표현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길을 걸으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왔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 길을 벗어나지 않은 이상, 설혹 그 길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다시 그 길로 들어서면 인생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찾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모든 길 가운데서 탈출기의 체험은 신앙인이 걸어야 하는 모든 길의 원형이며, 수많은 체험들의 원천이지요. 탈출기의 체험은 초대교회와 초대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반향되어 드러나고, 특별히 사도 바오로의 다마스커스 체험에서는 탈출기의 핵심인 탈출과 과월 체험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 길은 이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이며 방식이 되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앞장서 걸으셨던 파스카의 길이며, 동시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수련장으로 봉사할 때, 수련기간 동안 사순절, 특별히 성지주일을 전후해서 수련자들과 함께 도보로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기도 지역의 성지 순례를 했었습니다. 그 때가 80년대말부터 90년대 초반이었지요. 그런데 도보성지 순례를 하다보면, 성지 순례길은 인생 여정과도 같음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의식 없이 걷지만, 어느 순간 이게 장난이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제대로 걷는 법을 배우잖아요. 인생길도 동일하게 살아가면서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내면에는 의문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의문을 붙들면 붙들수록 어려움이 수반되고 고통이 시작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평화란 어려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요한 16,33) 인생의 참된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늘 십자가를 통해서 얻어 만납니다. 


<2부>
처음에는 모두가 함께 출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서 그 걷는 속도며, 걷는 모양새도 달라집니다. 자기 성깔대로 성급한 친구들은 자신만만하게 앞장서 치고 나가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뒤처져 발이 까지고, 발목에 이상이 생겨 낙오하기도 합니다. 처음은 더디지만, 차츰 자신에 맞는 걷는 모양새를 찾고 제 속도를 내면서 묵묵히 걷는 친구들은 끝까지 걷게 되고요. 수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유혹은 다름 아닌 속도라고 합니다. 속도란 인간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마입니다. 남보다 빨리빨리, 느림의 생활이 수도생활의 근간이며 속도인데 이젠 예전과 달리 이 속도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성지순례도 그렇고 인생길도 예상하지 않은 어려움이 생기면서 심각한 혼란과 갈등으로 힘겨워합니다. 내적인 싸움이 시작됩니다. 자신과 하느님과의 처절한 싸움 말입니다. 예를 들면, 수도자의 순명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옳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뜻을 살려고 하기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상충할 때, 하느님의 뜻을 살기 위해 비우고 버리며 죽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의식의 과정이 아니라 내성에 따른 깊은 깨달음이 동반해야 합니다. 처절한 고통을 끌어안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결과 선물처럼 내적 평화는 한순간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게 다 자신과의 싸움이었지만, 뒤늦게야 그 갈등과 유혹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수도생활은 마치 장거리 경주와 같이 아주 먼 길입니다. 그 길은 단조로움과 평범함의 반복되는 길입니다. 수도자는 매일 매일 동일한 시간표와 공간에서 동일한 일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떠나온 거리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길이 보이게 되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규칙의 반복은 하느님을 향한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수행과 실천입니다. 이러한 실천은 자신 안에 내적 질서와 방향을 하느님께 정향定向하도록 해 줍니다. 이 매일의 수행과 실천은 자기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수용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이며 방법입니다. 수행 실천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일깨워 주는 것이며 종내에는 하느님 안에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해준다는 이 평범한 일상의 신비를 말합니다. 수도자 monk는 히브리말로 yahid라고 하는데, 본질적으로 자신의 원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 온 나그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 수도자로 하여금 나그네가 되게 하고, 순례자가 되게 하며, 마음의 광야를 탐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수도자는 세상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동일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상의 단조로움과 반복으로 놓쳐버릴 수 있는 하느님과 자신과의 싸우는 법을 세상에 증거하고 증언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이 없다고 봅니다. 

길을 걸으면서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이 벌어져서 지연되고, 우회하게 되고, 방황하고 갈팡질팡한 것처럼, 인생길도 그런 돌발 상황이 일어납니다. 때론 자신으로 인해서 때론 타인으로 인해서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예기치 않은 시련을 만납니다. 인생길을 걸으면서 시련과 유혹이, 슬픔과 고통이 없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인생의 더 높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 시련과 유혹은 심해진다고 봅니다. 그럴 때면 내면은 마치 ‘파헤쳐진 공사장’과 ‘오만가지 물건으로 뒤석혀진 책상서랍’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시련과 유혹은 인간의 현실이고 삶의 과정입니다. 시련과 유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유혹이나 시련이 없으면 인간의 삶은 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혹은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기도하게 합니다. 유혹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어쩌면 유혹은 하느님을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영적교육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유혹은 하느님에 대한 유혹입니다. 때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갈수록 무디어 집니다. 모든 것이 칼로 무 짜르듯이 분명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흐릇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했던 마싸의 광야의 상황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실존적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은가 하며 주님을 의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탈17,7) 유혹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왔던 나이 많으신 수도자의 입에서나, 신자들의 입에서,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런지 자꾸만 의심이 생겨’! 유혹에 떨어지면 인간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립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나머지, 이제 그의 길은 낯선 곳을 헤매고 죽음으로 내리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길이 아닌 세상의 길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넓고 널찍하여 그 길로 냅다 달려가지요. 느리고 좁아터진 길을 걷다가 넓고 널찍한 길을 만나니 오직 속도가 붙겠습니까? 
   
루가 15장의 작은 아들이 바로 표본인 것입니다. 불나방처럼 철딱서니 없이, 제멋대로 놀아나더니, 한마디로 쪽박 찬게지요.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작은 아들이 달려갔던 그 길은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참으로 매력적이었지만, 그 길은 가서는 아니 되는 세상 길로, 거짓된 길이며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멀지 않듯이,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은총은 가까이 와 있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영혼 속에다 하느님은 깊은 갈망을 숨겨 두셨답니다. 생명에 대한 갈증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말입니다. 단지 사마리아 여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적이고 영적인 갈증과 갈망을 심어 두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젊은이들이 밤낮으로 노름으로 미쳐 방탕한 생활에 빠지자 공동체 어른들이 랍비를 찾아와 젊은이들을 단단히 훈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공동체의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그런 열정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제 열정의 그 방향을 하느님께 돌리면 되겠습니다!> 
 
작은 아들이나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우리의 거울입니다. 살다보면 상처가 깊고 어둠이 짙으면 그 길에서 숨어버립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회피합니다. 자기 안에 달팽이처럼 꼭꼭 숨어버립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자책 그리고 높은 방어와 편견의 벽 뒤로 숨어버립니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신앙의 길은 마치 영적 숨바꼭질과 같습니다. 찾아오시는 하느님과 숨는 인간 사이의 영적 숨바꼭질 말입니다. 타계하신 구상 시인은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티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마치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다시 듣는 듯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4,7-8) 
   
예수님께서 촛불을 들고 문을 두드리는 그림 보셨고, 잘 아시지요. (요묵 3,20절 참조)그런데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그림 잘못된 것 아니에요. 문에 고리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갑니까?> 그런데 성경을 한번이라도 꼼꼼히 읽으신 분은, <저 그림은 틀리지 않았지요. 저 문은 우리의 마음처럼 안에서 밖으로 열도록 되어 있답니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열리지 않은 마음의 문은 가장 무서운 감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은 영혼은 죽은 영혼이며, 그 영혼의 주인은 바로 죄입니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께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신앙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작은 아들의 길은 바로 하느님을 만나고 자신을 되찾아가는 길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나는 누구이며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했지요. 그런데 삶의 경험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물음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보다는 역설적으로 내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알게 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아버지와 관계 속에서만이 참으로 자신이 되고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5장의 작은 아들의 떠남과 되돌아감의 여행은, 여행이란 단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떠나 온 그 장소에로 되돌아감은 단지 장소에로 되돌아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분, 아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서 아버지와 관계 안에서 자신을 찾고 아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되돌아 갈 고향에 나를 기다리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은 작은 아들처럼 그 되돌아가는 시간과 거리는 각자가 살아온 삶의 강도와 비례하겠지요. 그 되돌아가는 길은 어쩌면 떠나올 때의 여행과는 전혀 다르겠지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상태! 꼿꼿이 서서 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엎어지면서 가겠지요.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처럼 말입니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볍게 기쁘게...

작은 아들은 예전에는 보아도 보지 못했고, 늘 자기식대로 세상을 보았기에 제대로 본 것이 아니었지요. 작은 아들은 눈뜬장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눈멂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제가 사순 4주일이었는데,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지요.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9,41) 도덕경에도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이 으뜸이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다.>고 했습니다. 눈멂을 알지 못하는 고질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까지 세상에 눈먼 사람이었으나 이제 사랑으로 눈뜨게 됨으로써 자신의 본래면목을 되찾고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구원이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관념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또한 느낌만도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이 영성입니다. 눈멂에서 눈뜸처럼, 라자로의 죽음은 여행에서 가장 난코스를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죽어야 삽니다. 왜냐하면 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열이듯이(=以熱治熱), 죽음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 치유책은 바로 죽음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은 거짓된 자아의 죽음이며, 이런 거짓된 자아가 죽음으로써 만이 진정한 부활, 새로운 생명이 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도 늦장을 부림은 라자로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라자로는 물론 그 죽음을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고통과 죽음을 직시하고 직면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나 순리처럼 모든 것은 죽어야 다시 살아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 충만한 삶으로 일어서고 거듭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만이 본래의 자신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 납니다. 
    
이제 저의 강의를 마침하면서, 어느 새의 이야기(=크게 죽을 때 크게 되살아 납니다. 大死大活)와  애벌레와 나비(=고통을 통해서 거듭남의 신비/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해야 할 신비이다.)를 들려주고 끝내렵니다. 모든 인생길은 바로 그 길, 파스카의 길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삶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세 잎 크로버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결합시킨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 길, 파스카의 길은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하는 진리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 파스카의 길은 우리네 인생살이의 과정이며, 순환하는 삶입니다. 파스카의 길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리고 파스카의 삶은 백부장과 함께 고난 속에서 부활을 관상하는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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