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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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도교 기도의 기본 구조

 

이 기도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이를 Lectio Divina라고 합니다.

 

독서 - 묵상 - 기도 - 관상

역동성 -- 들음 소화(=깊은 들음) 응답 초월적 합일

 

* Lectio Divina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인 기도는 <말씀의 아주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통교하는 차원으로 깊이 스며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 앞에 말을 잃고 침묵에 빠지며, 사랑받는 사람은 그 침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즐깁니다. 렉시오 디비나(=성독)는 하느님께서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관상의 선물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하나 되어 가는 총체적인 기도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 렉시오 디비나(=성독)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공時空이며, 그분의 사랑과 생명력이 내재하는 장소인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의 중심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첫걸음이 성경 안에 있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맛보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 말씀은 기도하는 영혼에게 은총을 주고, 도전하며,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대고 이야기하십니다. 아울러 우리 안에 침묵과 깊은 들음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며 마침내 사랑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깊은 일치와 합일을 선물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주도권은 언제든지 하느님께 있습니다. 관상은 바로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적인 결실이며, 이는 모든 이에게 열린 은총의 초대입니다.

 

* Lectio Divina 전통

교부들은 인간의 영적 여정을 <사다리>에 비유했습니다. 예를 들면, 바실리오, 예로니모, 특히 시나이의 교부 성 요한 끌리마꼬는 완덕을 향한 여정을 <신적 등정의 사다리>에서 30단계의 사다리로, <스승의 규칙서>와 <성베네딕또 규칙서>에서도 영적 사다리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근원은 야곱이 베텔 광야에서 꿈속에서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고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본 일화에서 기인한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창 28, 10~22 참조)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12세기의 카르투시오회의 귀고(Quigo Ⅱ)는 <수도승의 사다리>에서 수도자들이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올라가야 할 영적 사다리로 권고하였습니다.

● 영적 사다리로써 영적 생활은,

(1) 우리는 신비한 계시 장소 안에 있다.

(2) 우리는 약속의 장소 안에 있다.

(3) 영적 사다리는 성지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체험의 바 탕에 근거하여 초월을 추구하고 있다.

(4) 영적 사다리는 하느님의 자기 전개와 우리의 구체적 생활 체험과 연결된다. 예수는 야곱의 사다리로 하느님 계시의 장소이며 모든 약속의 성취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기도의 본질적인 길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며 기도의 응답이다. 그리스도의 실재는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또 다른 이미지는 감미료의 달콤함으로 상징화하여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독서: 축성된 생명의 달콤함을 추구하고

▲묵상: 이 달콤함을 받아들이고(성령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

▲기도: 이 달콤함을 간청하고

▲관상: 이 달콤함을 맛보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Lectio Divina를 영양 섭취하는 음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막에서 유혹인 배고픔의 유혹과 신원을 시험받았습니다. (마태 4, 4)

 

인간은 본질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설명하며, 성경의 도전을 어떻게 저항하고 거부하며, 수용하며 응답하는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적 말씀> 가운데서 <독서 안에서 찾고, 묵상 안에서 발견하 며, 기도 안에서 두드리고, 관상 안에서 열어라.>라고 강조합니다. 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합니다. < 나는 내 자신 힘껏 읽고, 나는 내 자신 절절하게 음미하고, 나는 내 자신 열정으로 기도하고, 나는 내 자신 침잠하도록 한다.>

 

토마스 머튼은 <마음의 기도, 27쪽> 안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적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은 인간 전부를 가담시키며 인간 존재의 중심 즉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발하는 것이다. 수도원 기도는 심사숙고함으로써 시작하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의 가장 깊은 중심을 발견하고, 우리 존재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 존재의 깊이를 깨달으면서 ‘마음을 향하여 귀환’함으로써 시작하는 것이다.>

 

기도의 기본 텍스트는 바로 성경이며, 4가지 단계를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이십니다. 어떤 본문을 읽느냐는 것은 흔히 신자들이 <성경 점>을 치듯이 손 가는대로, 성경이 펼쳐진 대로 아무 성서나, 어떤 구절이나 상관없이 선택해 읽는 것은 기도의 연속성과 친밀성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쉬운 본문 선정 방법은 전례 주기에 맞춰 그날의 독서와 복음에서 선정하든지, 아니면 신구약 성경 가운데서 한 성경을 선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이라는 거울, 빛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책(=생애 사건, 경험)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체험을, 우리 자신의 삶을 듣는 영적 훈련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디 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과거 체험이 전제됩니다. 즉 사도들은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을 직접 체험하고, 성령강림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 체험을 회상하고 깊은 숙고 끝에 성경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성경과 달리 역순으로 먼저 성경을 읽고 난 뒤, 깊은 숙고인 묵상-명상—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에 침잠하면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체험으로 흘러 나아갑니다.

 

Lectio Divina의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듣는 것이며, 보다 깊은 들음을 통한 소화이며, 거룩한 말씀에 따른 신앙인의 응답이고, 그 응답을 바탕으로 하느님과의 친교를 이루어 가는 과정, 단계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의 움직임은 이와 같은 경로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친교와 합일을 이루어나갑니다.

 

Lectio Divina는 본디 베네딕또회의 고유한 기도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기도의 수도자적 실천은 성 카시아노에 의해서 동방의 사막에서부터 서방에로 전달되면서부터 특별히 베네딕도 영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실천되어 왔습니다. 이 기도가 발전한 이래 베네딕도에 의해 설립된 남녀 수도 공동체 안에서 보편화 되었습니다. 이 기도의 방법은 매일 베네딕도회와 그와 연관된 수도회 회원들에게 강력히 요구되어 왔었습니다.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기도로 적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본디 구약과 신약 안에 이미 예시되어 있었으며 성경의 인물들이 이와 같은 기도의 방법들을 수행해 왔었습니다. 그러다 르네상스 시대(=개인주의 발호)을 맞아 새롭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전달되고 보급되었으며,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기도로 응용되어 왔습니다. 이 기도 방법은 인간의 4가지 기초적 근본 기능에 의거해서 각 4단계를 밟아 갑니다; 독서는 주님의 역사하심을 지각하는 영적 독서 안에서 육체 감각을 사용하며, 묵상은 생각(지력/기억:의지)의 기능을 활용하여 독서 안에 표현된 통찰을 깊은 들음을 통해서 반성하며, 기도는 하느님과 개인적 대화, 소통하고 하는데 새로운 통찰을 개인화하는 느낌의 응답과 열망을 불러일으키며, 관상 안에서, 개인의 직관(초월적 마음과 의지)은 이전의 3단계의 체험을 통합하는데 활용합니다. 관상하는 동안 기도하는 영혼은 신비적 합일의 표현된 사랑, 기쁨, 평화, 새로운 은총의 주입, 새로운 인식, 새로운 통찰로 다가오는 신비에 개방해 갑니다.

 

이러한 단계는 논리적인 구분이지, 자동적으로 순차적으로 1단게에서 4단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첫 단계로부터 우리는 내적 방향을 지닌 <흐름> 속으로 들어가며, 그 과정은 매 기도시간 마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도대로 각 단계로 흘러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는 매번 각 단계에 맞게 충실히 노력하고 단련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 과정에서 우리의 무력함을 체험하면서도 충실히 기도에 매진하면서 더 많이 비우고 내어 맡김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끄시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도 중에 그분 앞에서 갖는 진실한 자세는 칼 라너가 강조한 것처럼, <무한한 비움의 신비인 인간 그리고 무한한 충만의 신비인 하느님>의 만남과 소통, 내어줌과 받아들임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1) 독서= 들음

 

렉시오 디비나의 첫 단계는 독서 곧 성서 읽기 단계입니다. 기도의 재료와 방법에 있어서, 재료는 성경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독서의 방법은 들음이나 귀 기울임으로 영감받은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집중하며 경청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살아있게 전달하는 성령께 대한 믿음이 성경을 읽고 들을 때, 말씀하시는 분의 살아 있는 실재를 성경 안에 불어 넣어 주거나, 그 안에서 숨 쉬게 합니다. 즉 독서는 마음으로 듣는 신앙의 행위이며 순명입니다.

 

흔히 마음은 인간 생명의 구체적인 체험의 중심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아드리안 반캄신부는 마음을 인간 생명의 핵(Core)이라 표현하였는데, 이 마음은 2가지 기능, 즉 감수성Sensibility과 응수성Responsibility)의 능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첫 기능인 감수성을 활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흡입(吸入)합니다.(=마치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기 전에는 완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마음의 양면성은 항상 마음 안에 상존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등. 그런 상태에 놓여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인간 내면, 곧 마음 안에 비현실(=이상)이 아닌 현실(=영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의 의식은, 귀는 단순히 신체 기능 곧 청각 기능만을 의미하지 않고, 귀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들음은 마음으로 듣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첫 단계인, 독서는 성경을 읽고 있는 개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영혼에게 직접 인격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특별한 요점을 말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으며, 어느 때이든지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유일한 경우와 다른 모든 경우에도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 사건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것이고,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를 만나 사람의 일이지만, 이 사화는 모든 곳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일어났거나 일어날 일입니다. 죄 많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분은 모든 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발아래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인에게 한 말씀 안에서도 그분은 모든 듣는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래, 여기에는 그분의 말씀과의 어떤 역사적 거리, 시간적 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신에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의 노상에서 그분이 말하고 있는 사람에게 직접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따라 오너라.> <가서 더 이상 죄를 짖지 말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였듯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처럼 사랑의 편지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만남의 시간이며 장소입니다. 성경 전체가 전부 다 나에 관한 것(=나의 인격,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이며, 나를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나의 고유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읽기는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해석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하시는 그분과 우리 마음 안에 친화력을 가져다줍니다. 말씀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을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파스칼은 <하느님을 아는 것은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다.>고 했으며, 쌩떽쥐베리는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바르게 볼 수 있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그러기에 마음으로, 사랑으로 읽어야 합니다.

 

독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지의 조명과 지도 그리고 움직임을 느낄 때까지 말씀을 읽어나갑니다.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나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계속 읽어 내려가고, 멈출 때 함께 멈추면서, 세밀하게 천천히 한두 마디 혹은 구절이라 할지라도 휴식을 취하여 머물면서 때론 반복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모든 감각기능을 총동원하여 인물이나 배경에 집중하면서, 때는 어떤 때이며, 혹은 대화나 행위에 초점을 맞춰서 그리고 인물의 반응이나 느낌에, 그리고 동사動詞에 유의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읽기의 첫 단계인 독서는 “마음의 귀를 기울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어떤 분, 곧 타자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타자의 현존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주의 깊게 여러 번 마음으로 경청傾聽하다 보면, 구절과 단어들의 무게가 새삼스레 감지되면서, 본문의 객관적 메시지가 이전보다 더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옵니다. 이 순간부터 자연스레 묵상이 시작되는 것입다.> (이연학, 말씀에서 샘솟는기도, 성서사도직회보 13호에서)

 

참고로, 경청이란 귀로 그냥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이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정심수기(正心修己)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 이르길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래서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학에 나오는 청이불문(聽而不聞)을 다른 책에서는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듣긴 들었으되 마음이 없으니 못들은 척하는 것이기에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못들은 척하는 데야 백 번 애기를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독서의 경험이 쌓여 가면서 대체로 모두에게 생기는 체험은, 이른바 ‘미드라쉬’의 방법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성경을 성경으로서 해석하는 원칙’에 입각한 것인데, 한 단락이나 문장 혹은 단어가 상기시키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끌어들여 그 빛으로서 해당 단락의 의미가 훨씬 생기를 얻고 풍요로워지도록 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경우, 다른 성경 구절로 성경 구절을 해석하는 이 방법의 근저에는 성경 전체가 사실은 ‘단 한 권의 책’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빅톨 위고는 “모든 성경은 단 한 권의 책입니다. 그 책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했다. 성경은 셀 수 없이 수많은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단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루페르트는 그 말씀의 이름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빌면, “십자가의 말씀, 1코1, 18”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연학, 상게서)

 

저희 수도회 시카고 관구 소속의 성서학자인 캐롤 스튜밀러 신부는 <우리가 시편을 읽고 외우는 것은 신앙의 선조들이 살던 집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마다 여러 세기동안 하느님을 믿고 찬미하고 찬양하며 흠승하고 신뢰하던 사람들의 신앙 경험을 우리가 직접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보듯이,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모든 사건을 성경을 통해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특별한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즉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기억을 가지고 과거를 보고, 우리의 미래는 희망을 가지고 보며, 현재는 적극적인 관상의 눈으로 보게 합니다. * 기억하라:이스라엘의 실패는 기억의 실패였기에 성경은 끊임없이 <주님이 너희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라. 주님이 너희에게 이루신 그 위대한 일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 희망하라: 삶의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늘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시편 131장- 밝고 신뢰에 찬 눈, 마치 어머니 무릎에 만족스럽게 누워있는 어린아이처럼> <시편 42,12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그러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건-사람-사물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볼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시편23>

 

 

(2) 묵상 = 깊은 들음

 

묵상은 히브리어 Hag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본뜻은 마음의 반복, 반추를 의미합니다. <어떤 말 마디를 반쯤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는 의미로 단순히 소리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murmur) 혹은 되새김하는 것입니다. (=rumination) 그래서 <독서가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먹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것을 잘게 씹어 가루로 만드는 것>이라고 귀고는 설명합니다. 따라서 묵상은 어떤 의미에서 말씀을 꼭꼭 씹는 것입니다. 시와 음악에서는 재차 정선율의 반향echo 울림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반복의 형태는 힌두교나 불교의 전통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기도는 단지 독백이 아니라 신의 이름이나 말씀(=만트라/화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묵상이란 라틴어 Meditare라는 단어를 14세기경부터 생각하다(=이성 rational)와 숙고하다(intellectual)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희랍정교에서는 묵상이란 Mind into heart에로 진행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되새김을 통해서 기도하는 영혼은 거룩한 말씀의 뜻을 머리로부터 마음으로 더 깊이 알아듣게 되고, 말씀이 지닌 그 맛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본래 히브리어 어원적 의미에서 이미 느꼈을 테지만 묵상은 ‘말씀’에 대한 마음의 반향이자 반추이며 반복이지 사고나 지성의 차원은 본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묵상이 생각으로 고정화되는 부작용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대 데레사 성녀의 표현처럼,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지적하신 것은 적절한 강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텍스트를 읽고 묵상하는 것은 마음으로 깊은 들음 가운데 말씀을 접촉하는 전인적(=온 몸과 마음)인 행위입니다. 즉 영혼과 육체를 지닌 인간이 성경 본문을 작은 소리로 끊임없이 반복, 암송하고 마음에 각인시키는 단순한 방법입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보면, 묵상은 <암송暗誦> 즉 머리로 말씀을 복잡하게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성경을 보고 마음으로 들은 것을 입술로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습니다. 이렇게 묵상을 통해 말씀은 우리 의식 안에서 가장 깊은 마음을 접촉하고 침투하며, 우리의 응수성의 능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손수 하시는 일이며, 기도의 첫 순간 인간은 수동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기도는 하느님의 자기 소통과 자기 전개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들은 인간은 그 말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며,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묵상은 분석이 아닙니다.

 

 

 

기도 안내 5.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눈길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여기에,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애용하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성녀가 모든 사람에게 권했던 관상 기도의 기본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당신 앞에 서서 계시다고 상상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을 바라보고 계신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그게 전부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그 기도 방법을 아주 간단한 말로 표현합니다. “그분이 당신을 바라보고 계심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렇지만 성녀는 매우 중요한 부사를 두 개 덧붙였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스럽게, 겸손하게 바라보고 계심을 알아차리십시오.”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태도에서 이 두 가지 면에 특히 유의하십시오. 사랑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겸손하게 여러분을 보고 계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흔히들, 이 두 가지 태도를 상상하기 힘들어합니다. 많은 이들은 자기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주님을 상상하기를 퍽 힘들어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엄격하고 철저한 분이시며, 그들을 사랑하시기는 하지만 그들이 착할 때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자세, 즉 예수께서 그들을 겸손하게 바라보신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들을 겸손하게 바라보신다니 말도 안 된다고! 이것은 그들이 신약의 예수님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그들의 종과 노예가 되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노예처럼 죽으셨다는 사실을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눈길에서 사랑을 느껴 보십시오. 또 그 겸손한 자세를, 데레사 성녀의 한 자매 수녀는 기도할 때 항상 별다른 느낌을 체험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수녀는 위의 방법을 충실히 따르며 단번에 몇시간씩이나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중에 무얼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 수녀는 “저를 사랑하시게끔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하고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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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1.07.29 By이보나 Views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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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연중 제17주일 <2열4,42~44/에4,1~6: 요한 6, 1 ~ 15>

    Date2021.07.24 By이보나 Views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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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기도학교 강의 2: 기도하는 존재와 기도하는 삶

    Date2021.07.22 By이보나 Views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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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연중 제16주일 마르코 6, 30 ~ 34

    Date2021.07.17 By이보나 Views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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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기도학교 강의 1: 입문과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체험

    Date2021.07.15 By이보나 Views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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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연중 제15주일 마르코 6, 7 ~ 13

    Date2021.07.11 By이보나 Views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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