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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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도 = 응답

 

묵상이 깊이 진행되면서 독서는 기도로 말미암아 자주 중단되기도 합니다. 문자 속에 숨은 살아계신 말씀의 현존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그 말씀이 내 삶을 점점 더 뚜렷이 비추고 계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를 더 깊이 알아듣게 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진리>도 점점 더 깊어집니다.

 

이처럼 기도는 들음과 깊은 들음(=소화)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혼,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께 들어 올림이며 손을 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들은 말씀에 대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입니다. 응답은 들은 말씀에 대한 인간의 동의(同意)내지 동감(同感)입니다. 기도는 독서와 묵상을 통하여 받아들인 말씀이 마음의 밭(心田)에서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성독을 통해서 마음의 밭에 씨가 뿌려지고, 마음의 밭에 뿌려진 씨가 썩어 문드러지고 난 뒤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싹은 때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겠지요. 이로써 마음의 밭에 뿌려진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에 접촉하고 자극하여 영감을 고무시키고, 이를 통해 잠든 참된 자아를 흔들어 깨운 말씀은 초월적인 향상심(=aspiration)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내 자신이 된 목마름, 열망, 그리움을 일깨웁니다.

 

기도는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재약속(再約束)과 재헌신(再獻身)의 응답입니다. 흔히 기도란 하느님과 대화라고 표현하는데, 그 의미는 다름 아닌 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인간은, 묵상을 통해 들은 말씀을 깊이 소화하고,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말씀하신 하느님께 여러 차원을 통해 그 말씀에 응답하기에 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응답을 통해서 인간은 다시금 말씀에로 자신이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며 온전히 의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묵상이 이성적이고 지성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참으로 인격적인 기도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표는, 하느님에 관한 <사고나 개념>, 혹은 지식이 아니라, 내 가장 깊은 곳, 마음 안에 신비롭게 숨어 계시는 그분,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하느님은 나의 나이다. God is my me.>라고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이 가장 깊은 마음의 중심에 이르는 길의 시작은 우리 자신의 계획에 따라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할 때 마침내 마음에서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남으로써 시작합니다. 지적인 추리와 사고가 점점 줄어들고, 마음은 단순하게 솟아나는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 차며, 이것은 친밀한 대화의 형태로 취하게 됩니다. 기도 중에 우리 마음은 그분께로 그리고 그분에 의해 열리게 되고, 그래서 그분의 빛이 마음을 비추어 줌으로써 그 빛이신 하느님을 향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 이끄시는 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진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 완전히 응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응답하는 우리의 지향과 노력이 진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응답의 표현은 참회, 찬미(=찬양, 감사, 흠숭) 중재 그리고 청원의 형태로 표현되어 집니다. 그러면 이러한 응답의 사례를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1디2,1)

 

✠성경에 나타난 기도

 

(1) 기도의 원초적 사례: 회개와 회심의 기도

★ 카인의 기도(창세 4, 13~15)

이 구절은 극한 상황에 빠진 카인의 기도, 절규입니다. 야훼 하느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실존적 자각을 카인의 처절한 고백이 말하는 동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카인의 참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자책감이 통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의 가장 원초적인 기도는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의 기도였습니다.

★ 요나의 기도(요나 2, 1~9)

그는 야훼 하느님의 신탁을 어긴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분부를 거역하고 자신 이 선택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는 끝내 극한 상황에 빠지면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그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 다윗의 기도(1사무 12, 16)

다윗의 기도는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그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느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나탄에게 자기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2사무 12, 13) 이와같이 죄에 대한 통회가 용서와 구원에 대한 적극적인 간구에로 연결되었습니다.

★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루카 18, 9~14)

참다운 기도는 바리사이의 전시적인 보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부정적인 참회로 얼룩진 세리의 기도입니다. 즉 기도의 본질적인 개념에서 말한다면 기도는 죄책에 대한 참회와 고백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2)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살아있는 표현입니다.

★ 이스라엘 민족이 추수 때 야훼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신명 26, 1~11)

기도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다른 백성들과 선별하여 선민으로 간택, 이집트 해방,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즉 신앙의 일차적인 표현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 다윗의 감사의 기도 (2사무 7, 18~29)

다윗의 기도는 곤궁한 환경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간구함도, 하느님의 재앙이나 진노를 면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신 은혜만도 충분한데 미래의 축복에 대하여 지극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의 감사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을 동반하였습니다.

★ 주님의 기도 (마태 6, 9~3 ; 루카1, 2~4)

이 기도들의 시작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함께 감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이 기도의 시작에는 기도자와 하느님과의 가장 가까운 사랑의 문제와 함께 하느님의 존귀하심에 대한 찬양이 뒤따릅니다. 이는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의 표현이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과 그분 손에 맡기는 신뢰와 소망과 사랑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3) 기도는 언제나 나 혼자만의, 또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드리는 중재의 기도, 중보의 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 18, 22~23)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멸망이 내리지 않도록 기도하였습니다. 6번에 걸친 집요한 기도는 그에게 내린 축복이 자신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고 만민을 위한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중재의 기도는 공동체 의식의 표현입니다. 그는 일시적인 의협심이나 감상적인 동정심만도 아니라 공동체적 동질감 때문에,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처럼 진실했고 적극성을 띤 것입니다. 그는 자기 개인만의 축복이 아니라 다 같이 축복을 누리고자 남을 위한 기도에 온 정성을 기울였고 믿음의 조상으로써 숭고한 공동체 의식에 대한 신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예수님의 고별기도 (요한 17장)

이 기도는 온 정성과 열정을 다한 제자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의 표상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체감, 제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표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만이 아닌 이 세상을 위한 관심에로 확대 되었습니다.

 

(4) 기도는 우리들의 바램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표현되는 바램이 아니라 유한자가 무한자에게 희구하는 바람의 표현이 곧 기도입니다. 이 바람의 표현이 곧 간구입니다.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가?

★ 솔로몬의 기도 (1열왕 3, 3~15)

솔로몬의 바램은 현명하고 공의로운 왕으로써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밝은 지혜였습니다. 그의 바램은 격조 높은 바램이었습니다. 그는 부귀영화나 세속적인 욕망을 하느님께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자로써 하느님의 뜻과 그 나라를 이룩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하느님께 바랬던 것입니다.

★ 주님의 기도 (마태 6, 9~13)

아버지의 나라 또는 아버지의 뜻은 사람들의 세속적이고 본능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참된 것,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깨끗한 것의 극치를 이룹니다. 그런 최고의 가치가 이 땅 위에서 인정하고 확립될 수 있도록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차원의 간구를 뜻합니다. 우리의 간구 내용은 주님의 기도 안에서 예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마태 6, 31~33)

 

이처럼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될 것을 말합니다. 물론 주님의 기도에는 필요한 양식을 간구하는 기도가 있으나, 우리의 일상적인 욕구에 관한 것은 최소한도로 줄이고 가장 기본적인 하느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라는 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간구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간구 자체가 아니라 그 간구의 내용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나의 타인에 대한 태도나 성향은 어떤 유형입니까? 흔히 네 가지 영어 전치사로 그 유형을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toward, away, against, with.

 

저의 성향은 against 유형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와 동일하게 늘 상 하느님과 싸우는 유형입니다. 성경의 시편 작가의 체험 역시 이런 인간의 유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이로운 자유 체험을 통해서 <함께, 향하여> 그리고 경이로운 솔직 체험을 통해서 <떠나서, 거슬러>의 느낌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상태에 맞춰 시편이나 성경 구절을 선택해서 응답하는 것도 진솔한 기도라고 봅니다. 자신의 느낌이나 내적 상태의 억압이나 회피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마음 상태를 직시하고 솔직하게 기도로 표현할 때 기도는 그 생명력이랄까 활력이 넘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 정직이며, 기도는 사랑이기에, 사랑하는 존재에게 있는 그대로의 느낌이나 상태를 부끄럼 없이 서슴없이 드러낼 때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더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반응과 응답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응답이지 반응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마음의 고상한 포기이자 내어 맡김입니다.

 

 

기도할 때, <하느님을 여러분의 눈앞에서 보고, 그 다음에는 마음 안에 느끼고, 그 다음 손 안에서 체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는 눈과 마음과 손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3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루가 7, 11~17절의 나인의 과부 외아들의 죽음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이라고 했지요. 흔히 사랑은 인간의 구체적인 손과 입과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상여에 다가가시어 손으로 만짐과 위로하시는 부드러운 말씀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당신 사랑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로써 기도할 때 우리 역시 먼저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그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먼저 첫 단계인 눈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상상력을 활용해서 자신의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묵주기도를 할 때, 기도의 신비인 <=환희/빛/고통/영광> 중에서 하나를 상상하면서 그분 안에 점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그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면서 자신을 봉헌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서 마음대로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바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움직임, 내적 상태가 자연히 이미 내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께 들어 올려집니다. 이를 의식하면서 내 마음 안에 온전히 머무르시는 예수님의 현존에 집중하다 보면 차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으로 더불어 계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튀어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체험은 이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되어 예수님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힘으로 세상과 이웃을 만지려고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나인의 과부를 향한 사랑에서 다가서서 손으로 만지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도 그 사랑의 체험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기쁨과 평화를 지니고 모든 사람을 향해 나가 함께 나누게 됩니다. 마이클 다운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서서히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솔직한 자신을 하느님께 보여 드림으로서 하느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진실하심 안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열어 보이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먼저 우리의 눈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착각했던 여러 가지 환상들을 버리고 그 바닥에 있는 진실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시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하느님의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

 

 

(4) 관상 = 합일

 

관상의 체험 순간은 우리 노력에 좌우되는 것이 전혀 아니지만, 기도의 연장선상에서 그리 드물지만은 않게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귀고 2세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오늘날에도 기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혼에게서 말이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 기도가 흘러가고 있는 도중에 흐름을 끊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영혼을 만나 주시러, 천상의 감미인 저 이슬을 함빡 뒤집어쓰시고, 지극히 신묘한 향훈을 흩뿌리시면서 서둘러 오십니다. 지친 영혼을 새로이 하시기 위해 오시며, 주린 영혼을 배불리시기 위해 오시며, 메마른 영혼을 적시기 위해 오십니다. .... 취하게 함으로써 깨어있게 하시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이연학, 상게서)

 

아드리안 반캄은 인간 안에 두 가지 의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초월적 의지(영적의지=근원적 의지)와 다른 의지는 기능적 의지(실천의지=이차적의지;자아)입니다. 그런데 인격의 핵심인 마음은 매일 생활이나 기도 생활에서 근원적 의지(=하느님의 의지)보다 지나치게 이차적 의지에 따라 기도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깊어지면 참된 관상에 이르지 못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관상을 위해 이차적 의지는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내적 목마름과 배고픔, 곧 토마스 머튼이 표현한 것처럼 <기도의 열망은 기도 그 자체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 카시안은 <기도는 우리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표와 의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의 창조를 즐기기 위한 것이지 일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기도는 기도 그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 친교와 합일에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기도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는 뜻입니다. 초월적 의지는 독서와 묵상을 통해서 사랑스런 신비의 자각을 일깨우는 정신을 조명합니다. 또한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을 향하려는 경향의 내적 전체성을 드러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뜻(=의지)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인간의 기능적 의지와 실천 의지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그의 백성/자녀를 사랑과 생명으로 자유롭게 하고 충만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발타살은, 하느님의 말씀은 두 가지 경사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판단과 변형/변모이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판단하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사실의 자각에서 하느님의 진리로 우리 자신을 나아가도록 고무시키며,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변모하도록 일깨웁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움직임과 흡사합니다.

 

탈출기 사건 = 노예 상태로부터 - 사막을 통하여 - 약속의 땅으로

From Through Into

예수 파스카 사건 = 고난 - 죽음 - 부활

 

토마스 머튼은 <마음의 기도, 106쪽> 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고통을 위한 또 고통의 숭배로 만들려고 하여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자아 부정과 희생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인 본질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기도 생활이 우리 영성을 초연하게 변화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새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기도는 ‘회개(Metuneia)’를 동반하여야 할 것이고, 이 회개는 마음의 깊은 변화로써 영적인 면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어떤 의미에서 우리 존재가 죽는 것이다.>

 

 

✠ 관상의 어원

관상이란 단어 라틴어 cumtemplum은 3-4세기경부터 교회 안에 사용해왔으며, 그 뜻은 Cum(with) + templum(temple)의 합성어로, 성전이 의미한 것처럼 <거룩한 공간과 함께>(the Sacred Space)라는 의미입니다. 성소(聖所) 중에 성소는 지성소이고, 그곳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결국 관상이란 어원적 의미는 <존재 의미의 원천과 함께, 성지와 함께, 내재하는 신비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독서(=들음)와 묵상(=깊은 들음/소화) 안에서 Soul-Abba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동의하고 응답합니다.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존재 심층, 하느님의 생명(=본성)으로 되돌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 28절에서 말씀하신 아버지께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관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며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이라 하느님의 신적 생명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 친교입니다. 발타살은 <성경의 말씀은 하느님의 심층에로 우리를 직접적으로 이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취하는 공간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건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관상은 자신의 내면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내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초월적 신비입니다. 초월적 의지의 행위는 사랑에 의해서만 조명되고 인도됩니다. 이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스런 지혜 앞에 우리의 감각(신체적인 감각, 특별한 생각, 의지, 상상, 기억)은 흐려진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신비적 체험으로써 관상(=이는 Lectio Divina의 자연스런 결실이자 결과이다.)에서 표현한 신비라는 의미를 Louis Bouyer의 <영성입문>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신비(Mystica)는 성경의 충만한 이해인 신앙에 속합니다. 성경의 가장 심오한 신비는 성경 안에 숨겨진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이는 신앙에 의해서만이 접근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계시의 궤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의식 안에서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신비에로 인도됩니다.

(2) 신비는 성사에 속합니다. 실재는 숨겨진 것이지만 신앙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4세기의 예루살렘의 시릴로는 ‘성경은 우리 삶 안에서 성사 효과의 실재와 신비로써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3) 체험적 관점;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선포하는 것과 성경 안에 내포된 것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그리고 인격적으로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비적 체험은 관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직접적으로 이해 불가능합니다. 이는 오로지 성경과 성사 안에 바탕하고 있으며 아직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거행되지만, 전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만일 신비적 체험이 체험적 수준에만 머물 경우는 주관적일 수 있기에, 성경과 성사에 바탕 하는 수준과 조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과 성사에 바탕을 둔 신비적 체험은 성부께 되돌아가는 방법이자 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성경과 성사를 기초로 하는 신비주의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Bouyer는 신비주의란 <복음의 진리(사건)의 은총과 그리스도인이 신앙에 근거해서 하느님 자신의 사랑에 의해서 이룬 성사 생활의 체험은 현실의 심오한 이해이다.>고 결론짓습니다.

 

관상 기도는 단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요, 그 사랑의 지각이고 인식입니다. 관상 기도는 사랑이신 성령의 신비스런 활동에 사랑의 열망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관상 기도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사랑의 열망, 즉 <내가 갈망하는 것, 내가 찾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일 뿐입니다.

 

신비는 사랑을 통하여 소통되고 계시된 신적 실재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신비는 그 자체로 알려지고, 특별히 십자가는 그 신비의 압도적인 표현입니다. 1코린 2,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파스카의 신비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신비를 향한 여정은 신앙의 위기(=엠마오 여정의 두 제자들—함께 하심, 들려 주심. 빵을 떼어 주심으로 눈이 열림으로 신비를 깨달음) 상태에서 통속적인 것, 판에 박힌 관습적인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 합니다. (망각의 구름 속에 내던져 버려라) 그리고 무지의 구름을 통하여 사랑 안에서 신비의 지혜이신 하느님과 사랑스런 친교에 들어가 하나가 되어가는 여정입니다.

 

여기서 구름은 항상 우리의 통제를 넘어서는 것이며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이미지(=앎의 결여)이며 신적 소통과 계시의 장소를 상징하는 신비의 영적 표상입니다. 신비는 초월 그 자체를 통하여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비는 성령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령은 우리의 초월적 열망을 움직이는 원인이자 동인입니다. 그런데 신비는 구름으로 드러나지만, 아직 그것은 불명확한 끌어당김입니다. 성령은 초월적 의지에로 움직이게 하고, 신비에로 우리 영혼을 끌어당깁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초월적 의지의 움직임입니다. 신비는 항상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모든 기도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관상기도의 전형으로써 구심기도 (求心 centering prayer = 자아의 가장 깊은 중심을 발견하기)는 트라피스트의 성요셉 수도원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흔히 향심기도, 마음 집중기도라고도 불리지만 저는 구심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구심 기도의 배경: 그리스도 신비주의 전통에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원천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14세기 익명의 영국인이 쓴 <무지의 구름>이란 작품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여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을 새롭게 하려는 기도 운동입니다. centering prayer란 표현은 토마스 머튼의 <살아 있는 하느님과 만남을 위한 유일한 길은 존재의 중심에로 내려가는 것이다. >라는 표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구심 기도의 본질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체험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인식하게 된다. 그다음, 모든 생각과 언어와 형식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계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열어 보여야 한다. 이것은 지적인 활동과 정신적인 작용을 모두 초월한 것이다. 이 깊은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한 단어를 아주 천천히 아주 작게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욈으로써 혹은 더 좋은 방법으로는 이 한 단어에 우리 마음을 집중함으로서 모든 개념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계신 하느님께, 그리고 완전한 침묵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이러한 기도 유형은 물리적, 심리적, 지적인 작용을 다 초월하고 있으며,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게 한다. 이 기도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내와 수련이 요구된다. <익명의 수도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76쪽>

 

구심 기도를 다시금 요약하여 정리하자면,

☼ 자아의 중심을 통과하여, 그 중심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 육체적(느낌), 기능적(실천의지)의 작용을 멈추고, 이 모든 작용을 통과하여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초월적 체험과 인식에로 나아갑니다.

 

구심 기도의 3가지 규범

(1) 시작 전에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힘(3분)

◣ 성령께 기도를 드린다.

◣ 살며시 눈을 감고, 몸의 긴장을 풀면서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머리에서부터 차츰차츰 내려가 자신의 가장 중심부분,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이미 마음 깊은 곳에 내주하시는 하느님께 집중. (어떻게 마음을 침잠할 것인가의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 기도의 마침 부분에서 몇 분 동안 주님의 기도를 하고 끝낸다.

(2) 현존 속에 머물면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사랑으로 충만된 우리 존재의 심층에서 울려나오는 짧은 단어를 발견하고 반복한다.

(떠오르는 말: 아버지, 하느님, 예수님, 나의 주님, 나의 사랑, ....사랑, 평화 등)

(3) 다른 분심이 일어날 때 그 낱말에로 되돌아가라.

기도의 말에로 단순히 그리고 부드럽게 되돌아가는 이상의 어떤 것을 자각하게 된다.

 

구심 기도의 원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의 심층에 계시다는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방법이란 기도 말 (=기도주문, mantra)을 배경 음악과 같이 사용하지만, 이 기도 말은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의 소리일 뿐입니다. 다만 기도 말을 통해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노출 시키는 것, 하느님 대전에 있으려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원하시지 않고 다만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수동적인 기도만이 우리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능동적인 기도 역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비적 관상 기도를 사랑의 지혜인 관상의 역동적 움직임을 언어로 표현하자면,

먼저 신앙에서 출발하며, 신앙의 표지인 성사는 신앙을 촉진합니다. 즉,

- 신앙은 듣고 봄을 통한 이해의 조화이다.

obedience = ob + audire

respect = re + spectare

consonance = cum + sonare

- 신앙은 사랑에 지향하고 합일과 일치하길 바란다.

사랑은 관상을 통하여 사랑의 대상인 하느님과의 합일된다.

관상의 합일은 사랑의 지혜 안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사랑의 지혜를 추구하고자 하는 갈망/추구의 접근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빛: Kataphatic (象의 길) - 긍정적 - 능동적 - 획득적 - 자유의지

어둠: Apophatic (象 없는 길) - 부정적 - 수동적 - 주부적 - 은총

 

서방교회 – 양적개념으로 파악: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 속에서 추구 = 내재성 -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현존안에 머뭄으로 이해함.

동방교회 – 질적개념으로 파악: 하느님의 불가해소성: 하느님은 완전한 타자이자,

피조물과는 전적으로 구분 = 초월성-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감.

 

 

 

 

기도 안내 6. 나의 숨 안에 계시는 하느님

(드 멜로의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나는 앞에서 종교적 색채가 좀 더 짙은 몇 가지 방법을, 그러나 알아차리기 훈련과 대체로 비슷한 도움을 주는 방법들을 소개하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한 가지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잠시동안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리고 잠시 동안 그 의식 속에 머무르십시오.

 

이제, 자기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기 속에는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이 충만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공기는 바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끝없이 드넓은 대양의 공기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바다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존재가 짙게 물들어 있는 바다라고, 여러분은 허파에 그 공기를 들이마실 때, 바로 하느님을 들이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숨 쉴 때마다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을 들이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십시오. 이 깨달음 속에 될 수 있는 한 오래 머무르십시오.

 

매번 숨 쉴 때마다 하느님을 들이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무엇을 느끼는지에 유의하십시오.

 

이 방법은 여러 가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소개하겠는데, 이 방법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따 온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호흡이 곧 생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그분 자신의 숨을 거두어 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죽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의 숨, 곧 그분의 ‘영’을 그 사람 안에 계속 불어넣어주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이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 자기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의식하십시오. 그분이 들어오시면서 가져다주시는 그 거룩한 에너지를 가슴에 가득 채우십시오. 숨을 내쉴 때, 자신의 온갖 더러움을, 두려움을, 부정적인 느낌 등을 내 쉰다고 상상하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들이마시고 자기 자신의 온갖 더러움을 내쉬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온몸이 빛을 발하면서 생기를 띠어 가는 것이 보인다고 상상하십시오.

 

분심이 들지 않는 한 가능하면 이 의식 속에 오래 머무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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