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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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도교 죽음의 신학적 의미>

 

이런 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전제하고 <그리스도교 죽음의 신학적 의미> 가운데 세 가지 점만을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예수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자 했던 그분의 삶의 절정이다복음에서 고통이나 십자가가 중심이 된 까닭은 단지 예수의 삶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Passion 즉 고난이란 단어에는 양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 측면은 고난이란 차원의 수동적, 소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단지 주어진, 덮친 ‘고통을 당하다, 참다, 견디어 내다.’는 수난受難의 측면이며, 이와 다른 관점은 고난의 능동적,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투신, 헌신하려는 열정’인 고난苦難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은 단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면에서 폭력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10,18)라고 말씀하심을 통해서, 당신의 죽음은 당신이 살고자 했고, 살았던 삶의 가장 탁월한 열정의 증거이며 투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죽음은 사랑의 가장 압도적인 표현이며,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살아 온 삶을 이해할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Quale vita, tale morte.) 이런 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실패로 끝나지 않은 죽음이며 그 자신이 살고자 했던 <타자를 위한 존재>(요13,1)방식을 통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10,10) 드러낸 예수님의 삶의 절정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업적이며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Mr8,34)>는 것은 예수가 행했던 생명을 전부 내어준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더욱 최후 만찬에서, <내어 주는 몸과 흘리는 피>는 많은 이를 위한 죽음이며(14,22~24), 이를 통해 이사야 예언서(53, 12)의 주제인 <수난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완성하십니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명백히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2) 십자가(=사랑의 죽음즉 부활부활 즉 십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부활을 재발견하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애석하게도 고난을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의 죽음을 압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요. 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당신 삶과 사도직의 결과였으며, 부활은 고난과 죽음의 장엄한 승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고난 속에서만 부활을 관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 있던 백부장은 이 모든 일을 목격하고 난 다음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Mr15,39)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그의 고백은 그가 참으로 예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을 관상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고난 속에서 부활을 관상한다는 것은 특별히 우리의 어려운 상황과 맞부딪혔을 때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영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갈바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에게 슬픔과 실패, 모순의 한 가운데서도 희망의 이미지로써 부활을 관상할 수 있는 학교가 될 것입니다.

 

J.M 포에르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이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스스로 죽게끔 작용했다고.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 속에서 단순히 하느님으로부터 요청된 속죄의 죽음 내지 대속의 죽음을 보려는 해석양식은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저 예수의 죽음이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 지불해야만 했던 댓가라고 여기는 고전적인 해석방식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 까닭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죽음을 그렇게 왜곡되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하느님을 무한한 범죄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요구하고 흡족히 여기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논거는 성서에 <그렇게 쓰여졌기에> 그 일은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즉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게끔,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예수의 죽음은 전체 구원사라는 역동성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그 맥락과 일치하는 범주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사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하느님이시다.>는 계시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 생명의 원천이 되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한 이 약속은 틀림없이 성취될 것입니다.(로8,32참조) 이 약속은 어떤 이유로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처형당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의 죄에 대한 댓가로 하느님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했다는 대목은 성서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것은 하느님이 그의 아들의 인격 속에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는 당신의 결정을 극한까지 밀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요3,6 ; 13,1참조) 이렇게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압축된 구절이 표현하는 바는,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크고 압도적인 위대한 업적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에게 사랑받기 위해 사람이 치러야 했던 희생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느님이 받아들인 사랑의 희생임을 선포하는 것이 더 긴요한 일입니다. 마치 순교자가 되는 건 이유 때문이지 고통 때문은 아니다는 관점에서, 희생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희생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결합시킨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마치 세 잎 클로버 잎처럼<= 삶-부활-죽음>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먼저 삶과 유리될 때, 예수의 죽음은 그 논거를 잃게 되며, 역사적으로 많은 애매모호한 해설을 낳게 했습니다. 즉, 첫째는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잔인한 하느님의 상(象)으로, 이는 곧 왜곡된 하느님의 이미지이며 거짓된 구원사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주도권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희생에 의해 설명되는 오류입니다. 둘째는 부정적인 영성으로, 사람들 상호간에 사랑에 중점이 있지 않고 고통의 가치에 역점이 주어지는 영성입니다. 셋째는 삶에 대한 크리스챤들의 빈약한 이미지 곧 죽음에 이르기까지 투신하려는 삶의 방식을 따르기보다는 구속적인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것을 성사적으로 획득하려고 공로를 쌓음에 치중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부활을 통해 그 의미가 승인됩니다. 즉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파스카의 여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삼종경에서,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로”, 이렇듯 신앙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명료합니다.)

 

큰 죽음(大死)과 큰 삶(大活)의 역동성: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3~24) 영적인 눈으로 보면, 대사와 대활의 경우와 똑같이 죽음과 부활은 즉(卽, 바로 그것)으로 직결되어 있기에, 십자가 즉 부활, 부활 즉 십자가, 십자가는 바로 부활이요, 부활은 바로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자기 몸에, 자기 인생에 부활 사건이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자기 삶 안에서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단지 생의 끝에 오는 사건만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며, 매번 죽지 않고서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매번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 살기 위해 죽음을 거부하는 욕심은 매 순간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능동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런 사람에게는 죽음의 행위가 부활을 향한 투신이라고 봅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당신의 유작인 <신비적 죽음>에서 이를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성인은 매일 신비적 죽음을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 못 박히신 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23,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곧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죽음만이 부활에로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먼저 자기 죽음을 통과하여 죽음을 극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3,10) 부활을 믿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죽음을 통과한 사람이며(=영적이며 신비적 죽음)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안내합니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 곧 우리가 살고있는 신앙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세례로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더욱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받아먹어라!>고 내어놓으신 몸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죽음에 내어놓은 몸으로 이를 통해 우리에게도 영적이고 신비적 죽음으로 매일 매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죽음에로 안내하고 초대하신 것은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다른 사람들을 부활에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6, 3~4)

 

과거에 예수의 죽음이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가볍게 취급되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이란 곧 이어올 부활이 중요하기에 잊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취급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그 자신의 메시지에 충실했던 한 예언자의 죽음이요, 순교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삶에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께서 살고자 했던 바 곧 <누구도 나의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는 말로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단순히 잔인한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행했던 일에 따르는 결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곧 예수의 죽음은 <타자를 위한 존재>(요13,1)라는 삶의 방식에 따른 철저한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3)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죽음은 최종적인 실재가 아니고 하느님에 의해서 극복 지양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죽음의 힘을 극복하는 근거는 인간 속에, 곧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 곧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그분의 의지, 그리고 당신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시는 그분의 뜻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있는 불멸의 영혼에 입각해서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인간을 일깨워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희망합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신경에서부터 <나는 불멸하는 영혼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나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일컫고 있음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전례서에서도 <죽음 속에서 이미 부활이 발생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이 단지 한 개인에게서 그때그때 발생하는 개인적 사건이라기보다 보편적인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각 개인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살다가 죽고 난 후, 하느님에 의해 보존되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맺은 세계와의 관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상태인 천국이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환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서로 사랑하는 인간 사이의 기쁨의 교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위를 통해 천국을 건설하는 인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란 역사 속에서 완성된 조형물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생겨나 완성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를 위해 개방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충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자유로운 은총이며, 마지막 순간에 온 일꾼들도 그들의 보수를 받게 되리라는 복음의 약속에 달려 있습니다.(마태20,1-16)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 속에서가 아니라 삶 자체 속에서 사랑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약속을 수용할 능력이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2,9)

 

<제가 죽게 될 때 주여, 저는 당신께로 나아가나이다. 제가 당신 이름으로 전답을 주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당신 것입니다. 저는 이 초를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불을 켜실 차례입니다. 저는 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당신이 성전의 침묵 속에서 거처하실 차례입니다. 저는 당신의 뜻을 따라서 한 인간이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았습니다. 당신이 그 속에서 당신의 명성을 찾으신다면 이제는 당신이 수레를 이용하실 차례입니다.> (생떽쥐베리)

 

 

 

*** 잠시 쉬어가면서 생각하기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인테넷에서 퍼옴>

 

마블 시리즈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영화를 본 사람들은 늘 기분이 좋아졌었다. 통쾌함에 스트레스도 날아가고, 쿠키 영상의 비밀을 생각해 보는 일도 즐거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영화 시작 초반, 전편에 해당하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패배를 어벤져스가 멋지게 설욕했건만, 이상하게도 통쾌하지 않았다. 어딘지 애잔하고, 허무했으며, 동시에 따스해지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영화를 본 후 많은 이들이 "아, 뭔가 너무 허무한 느낌이 들어, 영화 보고 우울해지거나 삶의 무상함을 느끼는 나 같은 팬들이 많을 것 같아"라며 한동안 힘들어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이 복잡한 감정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런 반응은 바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인간 삶의 근원적인 조건과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인간의 조건을 상징하는 존재는 '타노스'다. 극 중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소멸시킨 타노스는 이름부터 그리스 신화 속 죽음의 신이자 프로이드가 말한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를 연상시킨다.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드는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의 본능, 타나토스와 에로스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타나토스는 죽음을 향한 본능을, 에로스는 생명을 향한 본능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은 삶의 에너지인 에로스를 따라 살아가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근원적인 삶의 조건인 죽음을 늘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인간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타노스의 "나는 필연적인 존재야"라는 대사는 죽음은 삶에서 필연적인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극 중 등장인물들은 그 누구도 타노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거나, 이를 직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영화 속 토르(=크리스 헴스워스)가 타노스를 언급한 헐크(=마크 러팔로)에게 "그 이름은 여기서 금기어禁忌語야"라고 경고하듯,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때문에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안은 근본적으로 '죽음'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운명을 직시할 수 있을 때 불안을 보다 잘 다스리며 삶을 온전하고 생기 있게 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편부터 이어진 타노스의 '생명체 소멸 작전'은 영화 속 모든 생명체들에게 죽음을 직면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사라져가는 경험은 죽음의 체험이나 다름없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힘을 모아 대항해도 타노스를 이겨낼 수 없던 장면은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어벤져스: 엔드게임> 속 모든 생명체들은 온통 슬픔과 절망, 두려움에 빠져있다.

 

누구보다 강한 어벤져스 멤버들 역시 타노스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특히, 직접 타노스를 대면하고 싸우다 실패한 이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벤져스들은 상실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다른 대처 방법들을 사용한다.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살아남은 이들을 모아 치유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가족과의 안락한 삶만을 생각하는 회피전략으로 상처를 이겨내려 한다. 토르는 알코올에 의존해 직면한 두려움들을 잊으려 하고, 호크아이(=제레미 러너)는 악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실패와 상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다. 어벤져스 멤버들의 이런 모습들은 실제 깊은 슬픔과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처해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대처 전략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할 뿐 현실을 개선하지도, 상처를 치유해주지도 못한다. 그러던 중 양자 영역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앤트맨(=폴 러드)의 증언을 계기로 이들은 과거로 돌아가 스톤들을 모아오는 '시간 강탈 작전'을 펼친다. 영화에서 어벤져스 멤버들이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선택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정신역동 지향의 심리치료에서는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탐색한다. 과거로 돌아가 자기 자신 및 중요 타인(=대부분 부모)과 화해하고 감정들을 재경험한다. 자신과 타인을 보다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이런 과정은 현재를 변화시킬 원동력이 되어준다.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도 바로 과거의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이를 대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각자의 중요한 과거로 되돌아가 펼치는 '시간 강탈 작전'은 사실상 심리치료의 과정과 유사했다. 캡틴 아메리카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고 자신이 탄생한 자리에 다시 가보며, 마음 깊숙이 밀어두었던 사랑하는 여인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뜨겁게 포옹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아이언맨은 이때 "대의를 위해 살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을 듯하다. 그리고 이 대화는 마지막 순간 아이언맨의 선택에 힘이 되었을 것이다. 토르는 그리운 어머니와 재회해 '자기 자신으로 살라!'는 귀중한 조언을 얻고, 술로 자신을 망치는 행위를 중단한다.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다시 만난 어벤져스들은 마침내 6개의 스톤을 모두 찾아낸다.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온 이들은 헐크를 자신 안에 수용해낸 브루스의 용기에 힘입어 사라졌던 이들을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는 계속 이어졌다. 헐크가 손가락을 튕겨 사라진 모든 생명들을 살려내던 순간, 타노스가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류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사라졌던 어벤져스 멤버들까지 모두 모여 죽음에 대항해 총공세를 펼치는 장면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럼에도 타노스는 끈질겼다. 마치 죽음은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반복해서 알려주는 듯이 말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심지어 또다시 패배할 것만 같았던 전쟁. 죽음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것은 아이언맨의 죽음이었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각자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언맨은 조금 더 특별한 면이 있는 캐릭터였다. 정의를 위해 싸우긴 하지만, 지난 <아이언맨>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그는 늘 인간적인 갈등을 해왔다. 가족과의 안락한 삶,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픈 욕망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 초능력을 보유하거나 유전자 변형 등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갖게 된 다른 어벤져스들과 달리, 아이언맨은 특수 제작된 수트를 벗으면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다.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아이언맨이 스톤이 박힌 장갑을 끼는 순간은 그가 인간의 숙명인 '죽음'을 수용했음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음을 수용했을 때, 죽음의 세력들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사라졌던 생명들이 다시 돌아와 세상엔 생기가 가득 찬다. 이는 죽음을 직시하고 이를 받아들일 때 삶을 더 풍요롭게 가꿔갈 수 있다는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의 설명과 일치한다.
   
이렇듯 <어벤져스 : 엔드게임>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고, 미래의 죽음을 수용할 때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생기 있게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부터 마음에 밀려들었던 복잡한 감정들은 아마 이런 인간의 조건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부분, 과거로 돌아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노인이 되어 나타난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 역시 늙음과 죽음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의 생명과 젊음이 새로운 세대로 이어짐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아이언맨도, 캡틴 아메리카도 끝내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던 '늙음'과 '죽음'. 지금 나는 이것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끝이 있음을 알고 주어진 시간을 충만하게 살아내고 있는 걸까.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남긴 묵직한 감정들을 따라 삶을 다시금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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