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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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도직 활동을 열심히 할 때, 저는 피정 지도차 여러 교구의 본당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때마다 가장 힘든 본당 신부님들의 요구 사항은 강론 중에 헌금에 대해 신자들에게 강조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했던 기억은 성당 출입구에 게시된 본당 신축헌금 봉헌자의 명단이었습니다. 약정된 신축금을 매달 정기적으로 봉헌하지 못한 채 매주 주일 미사 참석하러 와야 할 신자들의 마음은 어떨까 싶어서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아직 봉헌하지 못한 분들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게시한다는 게.....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서 돈은 필요하지요.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설 자리가 없거나 불편하게 만든 성당, 이것이 저를 슬프게 했었습니다.
 
또 다른 경험은 부활 대축일 이후 사제들 모임에서, 사순절 동안 영적 체험 나눔이 아니라 부활 대축일에 헌금이 얼마나 봉헌되었는지 나누면서 비교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도 있습니다. 본당 헌금의 차이는 신자 수와 비례한다고 하잖아요. 예전엔 대도시 본당이나 시골 본당이나 1인당 평균 2,000원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지금은 평균 얼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열을 내면서 강조한 주일 헌금을 늘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무심코 현금 궤를 보셨다>는 말씀에서 착안하셨나 본데, 본당 신부님께서 신자들이 헌금할 때 그 바구니 앞에 신부님이 서 계시는 방법이라고 말하더군요!

사실 저 역시도 안식년 동안 가끔 본당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본당 신자들처럼 주일 헌금을 하러 나갔지만, 제가 헌금하러 나가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누군가는 저를 보면서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봉헌할 때 자주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는 금전적인 봉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통한 봉헌, 기도를 통한 봉헌, 그밖에 다른 봉헌에 있어 우리는 주저하거나 갈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라 한다면 절대로 갈등할 수 없겠지요. 즉 내 것이 아니니 아까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잃는다고 생각하거나 아깝다고 생각하면 갈등하겠죠.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무엇을 보고 계셨을까요. 사람들의 얼굴을, 아니면 손이었을까요. 아마 몸 전체를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봉헌금은 정성입니다. 정성은 몸가짐에서 드러납니다. 물건을 사고 돈을 내듯 그런 태도는 아니었는지, 의무감 혹은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헌금하러 나갔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봉헌금은 당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헌금은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이 됩니다. 액수가 많고 적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에 부끄러워한다면 이미 정성이 담긴 봉헌금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가진 전부를 봉헌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듯이 생활이 궁핍해지면 자연히 인심이 메말라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가진 것을 몽땅 내놓는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내놓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내일의 삶을 보지 않고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부자는 이 과부보다 훨씬 많은 예물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드리는 헌금은 자신의 가진 것의 일부이었지만, 그 과부의 헌금은 그녀가 소유한 전부를 바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헌금은 하느님의 풍족함을 조금이라도 더 풍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풍족함은 우리가 드리거나 드리지 않거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사랑과 믿음의 증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렙톤 두 닢(마르12,42참조)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전적인 자기 봉헌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뿐 아니라 존재마저 통째로 하느님께 드리겠다는 사랑과 희생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전적인 자기 봉헌입니다. 만일 그녀가 하느님께 자신의 삶 전부를 맡길 만한 사랑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는 렙톤 한 닢이라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하느님께 드립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부와 부자들의 헌금의 차이는 바로 ‘전부인가 일부인가, 전체인가 부분인가?’라는 양의 문제를 넘어서 봉헌하는 마음의 무게와 질입니다. 참된 사랑은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과부의 심정은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으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그 전부를 준 사렙타의 과부 심정과 같았습니다.(1열왕 17,10~16) 이 마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여인의 절망적 상황을 보시고서, 엘리야를 통해서 그녀를 돌보셨던 것처럼 그 과부도 보살펴 주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열1716)

예수님은 오늘도 저희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실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봉헌금이 아니라 어떤 마음의 자세로 봉헌금을 바치고 있는지 보고 계실 것입니다. 돈을 바치는 것만이 봉헌이 아닙니다. 시간을 바치는 것도 봉헌입니다. 희생을 바치는 것도 봉헌입니다. 한 주간을 살면서 겪었던 아픔과 억울함과 오해와 실망스러움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도 봉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치는 봉헌 속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일주일의 삶을 함께 바치는 봉헌이 되도록 합시다. 

끝으로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세속성 곧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인 여러분이 일상의 삶에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가오심'을 깨닫고, 자신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하고 활동하도록 살아가는 게 참된 평신도의 역할이고 사명이라고 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신분에 명백한 규정입니다. 금년 시노드의 가장 특이하고 중요한 핵심은 <Synodalitas시노달리타스: 공동합의성>으로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관점은 교회 구성원인 사제-수도자-평신도가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함께 경청하며 함께 논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코로나 펜데믹 이후 세상의 변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몸짓으로 예전처럼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함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식별하고 대화하려는 시도라고 봅니다. 시노달리타스에서 가장 주목할 구성원은 바로 평신도들의 참여와 활동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런 점에서 금년 평신도 주일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로운 주일이 아닐까 생각하면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고 활동하는 여러분의 협력과 참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느님은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빛으로 오실 수 있고, 세상의 오류와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될 수 있으며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살려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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