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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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변하기에 아름답고 시간은 흐르기에 더욱 더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온 모든 시간이, 지나온 공간이 다 거룩하고 아름답게 느껴짐은 저만의 느낌이나 생각이라고 말하지 않으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저희 명상의 집에 오시기 위해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고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운전하면서 속도가 아무리 빠르고 출발지와 거리가 멀어져도 결코 과거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과거는 늘 우리 뒤쪽에 있지만 언제나 백미러에 담겨 뒤따라옵니다. 과거의 영상은 점차 작아져야 할 것 같지만, 인생의 주행거리가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올 때가 있으니 참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한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있습니다. 늘 그만큼의 거리로 우리 뒤에서 따라옵니다. 그러기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이란 앞쪽으로 살아가지만 뒤쪽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이해할 때 삶은 더욱 더 거룩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철모르고 멋모르며 수도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52년이 넘었지만 되돌아보면 한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수도원에 입회해서 신학교 생활, 군대 제대 후 수련기, 그리고 첫 서원과 종신서원 그리고 교황님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을 때의 설레고 흥분되었던 감동, 그땐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의 전율을 느꼈었죠. 그런데 이 모든 감동은 어느 순간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 버리더군요. 이런 감동은 아주 특별한 것이려니 생각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은 대단하거나 특별한 체험이 아니었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감정은 결국 왔던 것만큼이나 빨리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이런 감동은 어떤 무엇을 경험하거나 회심할 때 일어나는 정상적인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순간적인 경험은 실제로 지금 막 출발했으면서도, 이미 도착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수도 생활은 영적 밀월 기간이 지나고 나면 영성 수련은 일상사가 되고, 그저 오고 가는 평범한 생활로 점철點綴될 뿐입니다. 이런 평범한 삶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불연 듯 실망과 환멸은 소리 소문 없이 우리네 삶으로 스며들어옵니다. 그런데 환멸과 실망은 아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참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만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일어납니다. 내심 그 통과 의례에서 벗어난 예외적 존재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에서 ‘피에르 신부’는 이런 상태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환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삶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여러분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사도 베드로는 네 차례의 자기 환멸을 체험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자기 가족과 일터를 버리고 떠난 일 2)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의 예수님이 아니셨을 때 3) 예수님이 나약하게 죽으러 가시려 할 때 4) 스승을 부인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와 유사하게 저 또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환멸을 느껴왔습니다. 1) 공동체에 도착했을 때, 뒤에 두고 온 가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부분 2) 공동체가 생각했던 것만큼 완벽한 것이 아니고 많은 모순과 갈등을 지닌 공동체란 사실을 발견한 후, 꿈이 깨어짐 3) 오해받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고 느낄 때나 , 하는 일에 인정받지 못할 때 4) 분노와 좌절 의식이 끓어오름으로써 생기는 자신에 대한 환멸 등입니다. 공동체에 온전히 흡수되고 적응하려면 실망과 환멸을 이겨낼 방법을 터득해 나가야 하고 이를 통해 변화되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변화와 적응의 과정은 새로운 심화 과정이며 내적 자유를 향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변화는 부드럽지만 냉혹하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어려움에 직면하고 어려움이 시작할 때 진정한 영성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첫 열정의 감격을 되불러, 아무 주저 없이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단하는 동시에 감정적인 위로에 대한 갈망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성 생활에서 더 진보하려면 ‘어둠 밤’에 점차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어둠 밤의 완전한 무감각, 무기력, 텅 빔은 우리를 쉽게 속입니다. 즉 영적 여정을 중단하고 포기하도록! 지난 뒤 깨달음은 영적 어둠 밤이나 메마름이란 단지 밀월 상태의 달콤한 느낌과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문제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점은 근거 없고 까닭 없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없을 때와 사랑받지 못하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혀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란 결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의 느낌 여부와 상관없습니다. 현존이란 그저 ‘단순히 있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느끼는 법을 익히고, 자신을 조용히 가라앉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명백한 부재를 통하여 우리를 더 성숙한 의식의 단계로 들어 올리시고, 자기 봉헌과 사랑의 수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헨리 뉘웬은 ‘발돋음하는 사람들’ 138~142쪽에서 “사목은 부재를 통한 현존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좀 더 멀리 여정을 나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마치 사람이 태어나는 출산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어머니는 기막힌 출산의 고통을 겪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태어나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체험들은 계속해서 흘러가도록 놓아두어야 하며, 그것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정 중에 맑은 순간과 흐린 날은 물론 그렇지 않은 순간과 날을 만나야 하고, 우리의 목표를 참을성 있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 1~13참조) 사막의 교부인 압바 피맨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바치려면, 제 의지를 뒤로하고 앞길을 재보지 말지니. 이것이 영혼의 일을 하는 방법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필리 3, 12~14참조)

 

어제의 낡음을 떨쳐버리고 늘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위한 무질서한 자유와 기분 좋은 감동에 대한 갈망을 끊고 하느님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런 무사무욕의 태도야말로 열성, 열정의 특징입니다. 영어의 Enthusiasm이라는 단어에서, 그리스어로 en은 ‘하나’라는, theos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열성, 열정이란 뜻은 하느님께 깊이 빠져들어 열중하는 존재의 특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하느님과 하나됨은, 영적 성장에 의해 분발하고 촉구되어 열정적으로 봉헌된 존재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된 열정이란 영성의 본질적 의향이 감정의 기복에서 벗어난 독립된 상태입니다. 열성적으로 된다는 것은 진정으로 온 존재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품 같은 피상적 감정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좀 더 강렬한 비전에 사로잡힌 존재로서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열정적인 존재이자 온 존재로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당신 생애의 영욕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 감정과 혼동되지 않은 근본적 열정으로 사셨습니다. 실은 그분께서도 우리와 동일한 느낌을 모두 느끼셨겠지요. 그렇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말 그대로 그분은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에 있어 그분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온전히 존재 전체로 사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보호와 자기 이익에 대한 갈망을 끊으셨고, 당신의 온 마음과 정신과 몸과 영혼을 다해 남김없이 아빠 하느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과 정신, 몸으로 살고자 할 때, 근심 걱정과 두려움, 분노와 원한, 무분별 따위를 평화롭게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아우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한편 새로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욕구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우리를 아우르고 있는 만물의 아름다움과 선을 생생하게 의식할 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에 대해서도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초점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많은 관심거리로부터 멀리 옮겨지는 그만큼, 실망 대신에 오히려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영적으로 ‘깨어 있음’입니다.

 

인디언의 관점에서 본 ‘깨어 있음’의 의미를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에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 특별한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듣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행동하면서 동시에 듣는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음’ 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만큼 깨어 있다.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의깊게 들으면서, 귀가 아니라 눈으로 들으면서, 우리는 모든 일들을 관찰한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마음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마음과 생각이, 그리고 삶이 깨어 있도록 훈련을 해야만 한다.”(712-713쪽)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는 만큼 채워주시고,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만큼 우리를 차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이미 제 자신으로 가득 채운 사람을 채우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요? 이 변화를 꽉 붙잡고 지내는 일이라고 보며, 자신의 인생이 변화 중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변화를 모르는 체할 수도 없고, 이미 변화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해 볼 겨를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쉼 없는 변화 속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고통이 따르나 봅니다. 우리는 안정과 고통 없는 평온한 삶을 열망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으로 보이지 않더군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영성 생활에는 아무것도 매달릴 게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적나라한 믿음뿐이지요. 욥기 1,22절은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이미 변화했고 이미 회심했다는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며 변화의 길을 거절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영원을 향한 길에서 몇 걸음은 아주 작은 진전에 불과합니다. 영적 생활이란 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갖가지 거짓 환상을 뚫고 나가면서 영적인 일에 꾸준히 매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활방식과 관찰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존재의 중심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고요함을 깨트리는 시끄러운 알람시계처럼, 영적 생활은 가끔 엄격한 교사의 모습으로 인생의 잠에서 우리를 사정없이 흔들어 깨우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일화를 모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서 참된 수도 생활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화려한 학력을 가진 수도자와 어질기만 한 수도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토론에서 이겨 의기양양한 수도자에게 사부가 “형제여, 그대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졌네. 토론에서 이기려고 좋은 말을 많이 늘어놓았지만, 그대의 독선 때문에 형제를 잃지 않도록 기도나 하시게”라고 했다고 합니다.

 

인생 자체가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다양한 교수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의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함께 사는 삶 자체, 공동체 생활이 바로 가장 바람직한 스승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공동체와 더불어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영적 독서를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오기도 하고, 침묵과 기도 안에서 얻는 통찰을 통해서 오기도 하며, 일상의 반복하는 사도직의 소임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지만, 뛰어난 연주가가 되는 데에는 유능한 스승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책은 스승처럼 그렇게 반복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지평을 열어줍니다. 스승은 어떤 면에서 좀 더 잘 달리라고 박차를 가하는 코치와 같습니다. 비록 그는 선수와 함께 달리지는 않더라도 거듭거듭 독려함으로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노라면 선수 역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승의 말을 성실하게 귀 기울여 들은 만큼 겸손하고 반항적이지 않다면 스승은 우리의 성장에 결정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 살다 보면, 저 역시도 그랬지만,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저도 나이 들었다고요.’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곁에 스승과 같은 산 노인이 없긴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스승이 없다는 말은 배우려는 제자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스승이란 우리가 제대로,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을 지적해 주는 사람, 굳어져 가고 있거나 굳어져 버린 처지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볼 만큼 인생에 충분한 경험을 지닌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 뻔히 보이는데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를 많이 만납니다. 맛을 잃지 않은 스승은 자신의 짠맛으로 우리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새사람이 되도록, 전적인 변화에로 우리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는 법은 제가 이 점을 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절대로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삶을 통해서 보여줄 뿐입니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 것인지를 자녀나 아랫사람은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스승, 삶의 멋과 맛을 잃지 않은 스승은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아프게 지적하며,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우리의 감정이 자신을 눈멀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하느님의 사람은 ‘타인의 잘못을 보고 타인을 꾸짖을 줄 아는 사람이다.’고 말합니다. 사랑에 찬 질책처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요? 참 스승의 진정성은 우리를 진실하게 붙잡아주는 소리이며 현실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준거로 삼아 꾸짖을 용기가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저 또한 이제 눈을 감고 그냥 지나치거나 혼자서 투덜거리고 맙니다.

 

삶을 온전히 살려고 하는 제자는 언제나 회개, 진정으로 마음을 바꾸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Metanoia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마음noia을 meta바꾼다는 뜻이잖아요. 흔히 회개 메타노이아는 종종 도덕적 회심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사고방식, 관점, 마음의 바꿈’을 뜻합니다. 삶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는 결국 내적 실재이며, 마음의 변화이며 또한 사물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회개란 마음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참된 마음의 변화란 어떤 상태내지 실재일까요?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의식적인 각성이며, 자각이며, 출발입니다. 사물을 새롭게 봄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통찰을 시작하며 통합된 삶을 위해 변화를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한 첫 번째 선포하신 말씀은 세상을 향한 도전이자 초대였습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 사람과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고, 인생에 대한 모든 견해를 뒤집으라!” 메타노이아란 정감적인 회개, 회심 이상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죄에 대한 ‘후회의 감정’ 즉 괴로운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감정의 피상적 순화 같은 것을 느끼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사고방식을 거꾸로 뒤집고, 나아가서 우리의 정신과 행동까지 바꾸는, 완전한 돌아서기와 뒤집기를 감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 이건희 회장은 “바꿀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바꾸라!” 이는 곧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끝없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삶의 매 순간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널리 그리고 멀리 번져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회개 메타노이아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신앙의 체험이며 은총의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회개란 ‘하느님을 믿도록’ 현실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변화를 위해 내딛는 첫걸음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남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옛 완고함을 말끔히 씻어 없애기 위하여 변화의 강물에 잠겨 거듭 세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신앙의 불안’ 속에서 갈팡질팡하거나 안절부절 하는 사람의 인생을 물속에 던져 넣으면서, 살아있는 참된 믿음이야말로 해묵은 관념과 뿌리 깊은 태도를 거꾸로 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12:49,51)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이 말씀을 깨닫도록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분의 행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망을 넘어 실재 곧 하느님 나라를 보게 하고, 우리를 변화에로 이끄는 것이었으며, 일체를 보는 방식을 뒤바꿔주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메타노이아, 인생을 다른 시선 곧 하느님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거꾸로 바라보라!

 

저는 1996.1.10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남반구로 여행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시차가 거의 없는 공간 이동이었지만 제가 알고 있는 관념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기회였습니다. ‘겨울은 겨울이고 여름은 여름이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겨울이 여름이고 여름이 겨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단지 공간 이동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리 시간에 이미 배웠지만, 몸으로 겪었을 때의 충격은 엄청났으며 이를 통해 제 시선이, 마음의 관점이 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회개는 ‘어제와 달리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에서 본다고도 할 수 있겠으며, 이를 성경은 소경의 눈뜸에 비유합니다. 베싸이다의 소경 이야기(마르8, 22~26)에서, 베싸이다는 단지 공간적인 곳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그에 상응하지 못하고, 어제에 갇혀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낡음, 완고함. 닫힘을 말합니다. 그런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예수님은 먼저 그를 마을 밖으로 이끄십니다. 마을이란 낡은 삶의 자리로 판에 박힌 사고와 행동에 젖은 습관적인 우리의 의식과 행동 양식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장소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점차적, 점진적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회개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점진적으로 육적인 관점에서 영적 눈뜸에로 계속 변화해 나아가는 것입니다.(*불교에서, 돈오돈수는 단 한 번에 불심의 이치를 알아 구극의 깨달음에 도달하여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 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반면에 돈오점수는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돈오돈수건 돈오점수건 다 하나의 방편이며 다만 시절 따라 인연 따라 쓰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회개의 경우에 자캐오나 사도 바오로처럼 한 순간에 완전한 회개를 이루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와 같은 필부들은 점차적으로, 반복적으로 회개가 요구됩니다. 메타노이아 회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달리 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헨리 소로우가 표현한 것처럼, “무엇이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다만 어제와 ‘다르게 보기’ 위해서, 하느님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위치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지금 안주하고 있는 편안한 삶의 자리를 떠나, 떠나왔던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고 하느님께 되돌아야 가야 합니다. 회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되돌아감’이 시작이며, 이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때, 마침내 달리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전례력은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처럼 은총의 초대이며 구원의 시기임을 지시하고 환기시키는 영적 시간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의 싸움이며, 동시에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를 위해 거짓된 자신을 대면하고 직시하면서, 동시에 참된 자신을 찾기 위한 저항과 거부를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적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루카 15장의 작은 아들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되돌아가는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 역시도 아버지 집으로 향해 걸어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자신과의 싸움, 내적 순례를 하는 것입니다. 안성 출신 ‘조병화’ 님의 ‘천적’ 이라는 시는 단 한 줄입니다. “결국, 나의 천적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가장 큰 적은 조병화의 직언처럼 ‘결국, 나’ 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참되고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수도자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과의 싸움’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 싸움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과의 싸움, 더 나아가서 하느님과의 싸움은 바로 자기를 알고 억압되고 주입된 에고ego에서 참 자신 true self으로 변화를 위한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일이 바로 변화입니다. ‘복음’을 변화의 메시지라고 하는 까닭은 이 변화로의 초대가 해방과 자유, 구원에 있기 때문이며, 이 변화가 참 진리를 깨닫게 하고 이 깨달음에서 우리는 참 자유를 그리고 생명의 충만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영성 중심이 변화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변화 없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2,11에 보면,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표징이지만 실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표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변화’ 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물이 변했습니다. 물은 인간 본성을 의미하고, 변화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의 도래 표징은 이기심에서 사랑으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이타심으로 변화를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2,5)는 말씀 안에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세상의 죄는 이기심인데, 이런 옛 질서에서 새로운 질서에로 변화를 위해 예수님은 오셨고, 그 일을 수행하고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어머니 마리아의 지시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다보면, 반드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참된 변화는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단순히 누군가의 행위 규범을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1코 5, 10에 보면,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는 사실 말과 행위는 생각에서, 생각은 마음에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을 바탕인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바람직하고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를 이해하면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면 수용하게 되고, 수용하게 되면 변할 수 있습니다. (=이해—인정—수용—회개와 변화: 心思言行)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만이 참된 변화이며, 이때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을 보고, 닦고, 간직하기) 물론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영성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레바퀴를 돌려 실을 뽑듯이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변화는 단지 화장품을 바른 makeup은 될지언정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무의식 곧 본색本色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한다는 것은 생각으로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실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자기중심에서 타자 곧 하느님 중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훈련이란 사소한 관심에 집중되어 있는 옛 자아를 떠나보내는 노력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훈련은 우리의 새로운 생활, 즉 치유된 전인적인 인격을 창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변화된 마음에 주님께서 온전히 임재하시고 내주하시며 현존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자, 오너라.”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고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강의를 마치면서 샤를 드 푸코의 짧은 기도문, <오, 하느님, 미세레레miserere의 기도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푸코처럼 우리 또한 시편 50장을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낭독하다보면,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을 살피고 우리 죄과를 헤아리는 데서 시작하여 하느님을 관조하는 경지에로 상승한다. 즉 이웃을 향한 마음으로 만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상승이 이루어진다.>

 

시편 50장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 내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내 허물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 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판결하심 공정하고 심판에 휘지 않으심이 드러나리이다. 보소서 나는 죄중에 생겨났고, 내 어미가 죄중에 나를 배었나이다. 당신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내게 가르치시나이다. 히쏩의 채로써 내게 뿌려주소서. 나는 곧 깨끗하여 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다. 기쁨과 즐거움을 돌려주시어,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내 죄에서 당신 얼굴 돌이키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당신의 면전에서 날 내치지 마옵시고, 당신의 면전에서 날 내치지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얼을 거두지 마옵소서.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주소서.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오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 오리이다. 하느님 날 구하시는 하느님이여, 피 흘린 죄벌에서 나를 구하소서. 내 혀가 당신 정의를 높이 일컬으오리다. 주여 내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당신의 찬미 전하오리니 제사는 당신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리어도 받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주여 인자로이 시온을 돌보시고,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쌓아주소서. 법다운 제사와, 제물과 번제를, 그때에 받으시리니 그때에는 사람들이 송아지들을 당신 제단 위에 바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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