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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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씀드렸듯이, 사순 시기는 가던 길을 멈추고 십자가 앞에 서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아울러 어제의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거짓된 자아가 죽고, 참 자신으로 깨어 일어나 넘어가는, 건너가는 영적 과월, 파스카의 시기입니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고통이 낯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죽음과 함께 고통의 문제는 아주 오래된 인류의 의문이며 숙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에서 고난이나 십자가가 중심이 된 까닭은 역사적인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단지 그분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에 대한 실마리와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교회는 명백하게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교회 또한 끊임없이 묻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예수는 단지 폭력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투신하고 헌신하셨기에, <누구도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그것을 바치는 것이다.>(요10,18)고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 숙고하다 보면, 특히 교회의 오래 전승이자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는 ‘사도 신경’을 바치다 보면 문득 드는 의문은 예수님의 탄생 이후 그분이 살아오신 30년 세월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고 고백한 후 이내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 부분,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으로 훌쩍 건너갑니다. 물론 이렇게 고백한 배경은, 교회는 예수님의 삶에서 수난과 죽음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을 액면그대로 보자면 예수님은 단지 죽기 위해서 태어나신 분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관점, 바로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살아 온 모습과도 같다.’는 표현처럼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살아오셨던 삶과 사도직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30년 세월처럼, 드러나지 않은 삶의 30년이란 과정이나 단계 없이 예수님은 어느 순간 갑작스레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게 아니잖아요. 그분이 살아 온 ‘그 삶’과 사도직의 결과 주님은 당신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점을 좀 더 명확하게 할 때 그분의 죽음의 의미와 이유가 더 명백해진다고 봅니다.

 

예수님 시대의 실제적인 상황이나 성경에 드러난 상징적인 질병은 나병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영성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인지하는 질병은 알츠하이머, 디멘시아 곧 통상적인 표현으로 치매입니다. 치매는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섭기보다 오히려 두려운 질병입니다. 이런 근거는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가 기억의 실패였으며,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질병이 바로 치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봉사하고 있는 요양 병원에서도 많은 어르신들이 치매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상실 혹 망각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밤이 깊어지면 세상을 밝히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빨간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보다 이젠 어느 대형 기업의 광고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되찾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업적이며 구원의 상징’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라고 선포하는 것은 고통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기에 십자가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선포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십자가의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께서는 “자기 당대의 악을 예리하게 파악하시고, 가장 효과적인 구제수단은,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기묘한 사업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임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선포하라!

 

예수님의 육화, 강생은 곧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구원이란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4, 18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데>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이를 성취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며 사명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활 동안 하느님의 뜻과 달리 사람을 ‘사로잡고 눈멀게 하며 억압하는 모든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악의 현실을 눈감거나 무심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악에 대항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눈뜨게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하지만 악의 습성에 젖어 살아 온 이들로부터 거부와 배척을 받으시고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깊은 의도를 잘 드러낸 비유가 바로 ‘마태오 13, 1~9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선을 실천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나 결실을 얻지 못했음에도 당신을 통해 일하시는 아버지를,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 믿고 묵묵히 선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동시대의 청중은 물론 우리 눈앞에 꿋꿋한 한 인간의 모습을, 자신의 선한 행위가 종내 실패가 불가피하다고 해도 그 때문에 당혹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오 13, 24~30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惡을 善인 우리 가운데 두고 견디어 내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인 즉, 어떤 인간도 그 시초부터 선과 악을 분간할 능력이 없을뿐더러 자칫 악을 제거하려다가 선까지 함께 말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악을 거슬러 선을 관철하고 또 선을 악에서 보호하는 길이란 오직 하나, 단호히 선을 행하고 선을 고수하는 그 길만이 유일한 길임을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선 하나만이 악에 대처하는 진정한 해결책임을 입증해보이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로마 8,31~39참조)

 

저 또한 고통의 사람입니다. 어쩌면 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은 저의 동반자로 제 곁에 아주 가까이 머물 것입니다. 이런 삶의 경험을 통해 저는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고, 지금도 고통으로 힘겹게 생의 남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분들 곁에서 그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의 푸념처럼, ‘이렇게 살기보다 차라리 죽고 싶어’ 라는 표현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불교에서 말한, “인생은 고해와 같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의 궁극적인 의문은, ‘고통은 왜?’라는 울부짖음일 것입니다. 누구나 예상하지 않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닥치면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반증은 구약의 욥기에서, 욥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그토록 신음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몇 년 전 필리핀을 방문하셨을 때, 교황님께 열두 살짜리 소녀가 울면서, “많은 아이들이 부모한테 버림받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을 하고 매춘에 종사합니다. 왜 하느님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시나요?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요.” 하자 교황님은 이내 답변을 못하신 채 한동안 소녀를 끌어안아 주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준비한 영어 연설 대신 즉석에서 스페인어로 “소녀는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말이 아니라 눈물로써 표현했어요. 울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너의 질문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떤 사실들은 눈물로 씻은 눈으로만 볼 수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죄한 아이들은 물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교회도 그 어떤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가까이 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고통은 왜?’라고 묻는 이들에게 왜 고통을 당하는지 해답을 줄 수는 없어도 다만 함께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고통에 대한 의문은 근본적으로 신앙의 문제이고 하느님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고통에 대한 해답을 교회 역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 릴케는 다만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문제 속에서 그냥 살자. 그러면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고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또한 그런 의문을 던지며 살아왔지만, 무릇 그리스도인은 ‘답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문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믿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께 의탁하면서 주님의 뜻이 드러날 때까지 순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금언 또한 “제자가 준비하고 있을 때 스승이 나타날 것이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써 고통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 답을 찾을 때가 아니고 믿음이 필요한 때’인가 봅니다.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삶의 의문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노라면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이나 아니면 그 언제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날은, 그 순간은 꼭 올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바로 신앙의 문제라고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행위이며 실천입니다. 저는 1977년 수련기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의 한 달 동안 명동 성모병원 중환자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 왜 이런 고통을 제게 주십니까?’라는 의문을 저 역시도 숱하게 던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의 병이야말로 저의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 십자가를 통해 저는 거룩한 산 제물로 예수님께 봉헌할 수 있는 축복과 함께 은총을 받은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이 아닌 제 존재로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저의 고통이 더 이상 고통만이 아니라 제가 받는 祝福이라고 고백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우리는 고난 없이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디트리리 본훼퍼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고 증언합니다.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고난에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없으며 하느님 사랑의 저 깊이와 높이 그리고 길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고난의 극복은 고난으로, 고통의 극복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제가 고통이 은총임을 알게 된 장소는 바로 소록도입니다. 대신학교 1학년 때인 1971년, 저는 공동체 형제들 그리고 직원들과 함께 소록도로 봄 소풍을 다녀오고 난 다음 그 인연으로 여름방학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습니다. 소록도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나환우들을 만나서 함께 일하고 나누는 대화를 통해 나병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나병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흔히 나병을 생각하면 외적으로 일그러진 모습부터 연상하지만, 나병의 특징은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콧물이 나오거나 기침을 심하게 하면 감기에 걸린 것을 알 수 있듯이, 고통은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의 신호입니다. 마치 교통 신호등의 빨간불이 켜지기 전에 먼저 노란불이 켜지는 신호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좀 더 치명적인 고통을 겪게 됩니다. 고통에 대한 무감각은 이처럼 큰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고통을 느낄 때만이 더 큰 병이 도지기 전에 조치하고 예방할 수 있어서 빠른 치료와 치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경우엔, 우리는 고통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고통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해주고, 또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며, 종종 우리를 변화와 회심 그리고 성장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변화와 회심 그리고 성장의 동기가 됩니다. 다만 고통이 긍정적인 변화와 회심 그리고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바탕은 바로 ‘제자가 준비하고 있을 때 스승이 나타나는 것’처럼 고통이 주는 신호를 잘 들으려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자신이 몸으로 느껴봐야만, 곧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게 되고,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고 의탁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통은 하나의 위험한 신호이며 경고의 울림입니다. 또한 고통을 통해 우리는 ‘아픈 만큼 더 성숙해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지기도합니다.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는 표현은 한 여성이 결혼해서 자녀를 출산하면서 겪는 고통을 통해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됨으로써 자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존재로 변화되고 성장했음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머리로 깨달음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온몸과 마음으로 깨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고통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 고통을 억누르려고만 한다면,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고통은 이처럼 제자들이 들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교훈을 들려주는 스승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심에 불평과 불만,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선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아직도 회심과 변화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회개와 변화, 성장과 성숙은 언제나 고통의 체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만일 당신이 아픔을,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치유되고 있다’는 신호임을 잊지 마십시오. 불행 속에 기회가, 불행 속에 행복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랑은 없을까요?’라는 책에서 저자 ‘기 코르노’는 “모든 것에는 작은 틈이 있습니다. 빛은 바로 그 틈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합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를 통해 어떤 사람은 육체적 고통을 통해 영혼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사고 덕택에 자신의 내면으로 추락하게 되고, 다시 날아오를 기회를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고통이 가져다주는 선물과도 같은 행복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가벼워지지 않은 한, 우리는 마음의 문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때론 인간의 모든 큰 불행은 거의 사랑의 실패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육체적 질병의 원인은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갈등이다.’고 끌로드 사바라는 분은 주장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의 삶을 살려는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고통은 자신과 이웃과 더 나아가서 하느님과의 사랑이 실패한 데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실패 곧 사랑의 실패’가 고통을 낳습니다. 경험적으로도,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나 내적 갈등과 외로움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수많은 나날, 자신을 자학하거나 학대하며 살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과의 의미로운 관계, 친밀하고 사랑스런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사랑받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으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받을 수 없으며 그 결과 그는 더욱 외롭고 쓸쓸한 자신이 만든 새장에 갇히게 되고 삶의 많은 의미와 사랑의 삶을 위한 동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불행은 이처럼 사랑의 실패에서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아픔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자신을 마취시킬 수도 있으며 타인에게 그 탓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종내 그 고통의 칼은 결국 자신을 더 심하게 찌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회개가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분명 세상의 시선과 태도와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태도는 한 마디로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고통으로 삶을 즐기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인은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심을 믿고 이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고통은 회개의 초대이며, 회개는 변화와 성장의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고 물으시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9,23)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제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이해한다 해도, ‘제 십자가’는 사실 인간적으로 처치 곤란입니다. 확실히 십자가는 실존적인 고통이며, 때론 의미를 찾을 길 없는 억울한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목 현장에서 제가 만난 고통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분명 까닭 없는 고통이요,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넘어 하느님의 부재를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을 전제하고서, ‘제 십자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과 답은 한 마디로 우리 각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연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결국 날마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고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외모, 성격, 혹 능력이거나 아니면 부모와 형제 그리고 가정환경 등이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실제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겪고 있는 갈등 관계, 부모나 형제와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시부모와 불편한 갈등 등 그리고 그 갈등이 빚고 있는 육체적이거나 심리적인 고통과 아픔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전 제 어머니는 제가 겪고 있는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 많이 힘드셨습니다. 저 또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형과 형수와 관계에서 겪었던 고통을 제가 알고 있었지만 대신할 수 없었으며 단지 바라보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그게 바로, 우리의 또 다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길의 성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십자가는 지금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자기 십자가의 무게로 인해 너무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이 끈질기게 자신의 십자가를 바꿔 달라고 하느님께 애걸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그 영혼을 데리고 십자가 창고로 데리고 가서는 마음껏 자신이 원하는 십자가를 고르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지고 왔던 십자가를 내려놓고, 이 십자가를 아니면 저 십자가를 선택할까 고심하다가 너무 멋있게 보이는 십자가를 선택하고서는 기분 좋게 짊어지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화려한 겉모양과는 달리 자신이 짊어지기엔 그 십자가가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십자가를 선택해서 짊어지려 했지만,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친 나머지 자리에 앉아 고심하던 그의 눈에 한 십자가가 유난히 잘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펄떡 일어나 그 십자가를 짊어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자신이 새롭게 찾고 있던 십자가인 듯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 기뻐서 천사에게 이 십자가를 오늘부터 제가 짊어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피식 웃으시더니 그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렴아. 그런데 그 십자가는 본디 네가 짊어지고 왔던 십자가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처럼, 지금 우리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제 경험에서 말하자면, ‘참으면 병이 됩니다. 참지 마십시오.’ 물론 이렇게 말하면서도 저는 너무 많이 참아서 탈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참지 않고 받아들이셨듯이 우리 또한 참으면서 불평하지 마시고 받아들이십시오.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빚어내는 모든 것들은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은총을 베푸십니다. ‘주님, 제가 제 십자가를 날마다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짊어지고 갈 때, 어느 순간 십자가의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교환의 신비,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였듯이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사랑할 때, 우리 자신이 주님처럼 변하게 됩니다.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일 때 자신이 먼저 변하게 되고, 이 변화는 미움을 용서로, 악을 선으로 바꿔지고, 그로인해 자신은 물론 미워하는 그 사람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제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바림직한 방법을 배워볼까요. 십자가를 믿음으로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선 무엇 보다 먼저 ’하느님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승리가 절실히 요구되고 또한 이기적인 자아가 이타심으로 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에 따라 등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 무게 = 자기사랑/하느님 사랑 X 실제 무게>입니다. 예를 들면, 실제 무게가 100이고, 자기 사랑이 100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10이라면 십자가 무게는 1,000이 되지만, 반대로 하느님 사랑이 100이고 자기 사랑이 10이라면, 십자가의 무게는 10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는 이렇게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증가되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작으면 작을수록 실제 무게보다 더 가볍게 느껴집니다. 관건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만큼 십자가의 무게 또한 가벼워집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높거나 낮은 언덕이나 고개를 셀 수 없을 만큼 넘다보면 마침내 천국으로 들어가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 고개를 넘어가는데 자신의 십자가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힘들다고 투정하고 불평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십자가를 한사코 줄여달라고 하는 사람의 요구를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모든 고개를 넘어 마지막 고개의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 눈앞에 드러난 강과 강 건너 풍경은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습니다, 그곳은 마치 중국인들의 이상향인 무릉도원, 샹그릴라, 그리스도인들의 꿈인 파라다이스 곧 천국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개를 넘어갔더니 그 사람 앞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살펴보아도 강을 건널 다리를 찾을 수 없어서 그는 망연자실 넋을 놓고 앉아있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 자신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느라 뒤쳐진 사람들이 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누구도 지체하지 않고 이내 자신들이 짊어지고 왔던 십자가를 내린 다음 강 건너 편으로 내려놓고 자신의 십자가를 밟고 강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짊어지고 온 십자가는 바로 천국으로 건너가는 유일무이한 다리였던 것입니다.

 

그때서야 그는 매일매일 삼종경을 바치면서 기도했던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그렇습니다. 모든 구원된 사람들은 자신이 짊어지고 왔던 각자의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가 가져온 천국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고 살면서 깨달아야 할 진리는 지극히 단순하고 가까이 있습니다. 부활은 결국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천국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번 미사에 참석할 때, 사제들의 제의 문양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양이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보셨나요. 사제들의 제의의 앞과 뒤에 주로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앞의 십자가 문양은 자신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제의 뒷면의 십자가는 신자들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이로써 사제의 가장 아름다운 거룩한 사제적 삶의 표양은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모습이며, 이를 통해 신자들에게 ’제 십자가‘를 열심히 짊어지고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고무시키는 십자가의 삶입니다. 사제는 스스로 이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마치 운동선수들처럼 사제는 그리스도 왕국의 ‘십자가의 선수’라고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그 본을 보여주고,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로 ‘오늘도 자신의 제 십자가를 충실히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는 ‘고통은 왜?’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프랑스 시인 쟝 클로델은 <그리스도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에서 오신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신 현존으로 채우기 위해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세상에서 숱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와 결합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은 사랑으로 사람이 되시고, 사랑하기에 몸소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까이 오실 수 없었으며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증언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위험입니까? 역경입니까? 칼입니까? 아멘.>(로8, 38~39.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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