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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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은 ‘길을 잃으면 비로소 길을 찾게 된다.’는 말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인 사람, 곧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길을 걷는 것은 곧 길을 찾는 여정이고, 그 길 위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인 ‘길을 걷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영적 수행이기도 합니다. 길을 걷는 것은 외적인 길을 걸으면서 실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해 걷는 것이고 그 길의 끝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참 자기를 만나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는 곳인 마음 깊은 곳으로  향한 영적 순례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는 ‘집’을 떠났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으며, 작은 아들을 통해 배우는 것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은 아무리 멀다 해도 결코 멀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껏 세상의 많은 곳을 여행하였지만, 저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의 끝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며, 그 아버지의 집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으로 저는 에르미타주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결행은 헨리 나우웬처럼 저 역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탕자의 귀향’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렘브란트의 심정을 그리고 그의 시선에서 그 그림을 통해 특히 ‘작은 아들과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싶었고, 보다 더 절실히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화란 출신의 렘브란트는 유명한 화가였기에 젊은 날의 그의 삶은 화려하고 풍족하고 부유한 삶을 누렸었지요. 정상에 오르면 내려 와야 하는 것처럼 차츰 그의 삶은 내리막길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렘브란트가 ‘탕자의 귀향’을 그린 시기는 대략 그의 황혼기인 1866년과 1867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삶의 마지막 시기에, 그는 한 자식을 제외한 자녀 4명과 두 아내 그리고 모든 재산과 명예 등,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난 뒤에 비로소 ‘탕자의 그림’의 거친 손과 부드러운 손을 지닌 눈 먼 아버지의 자비로운 모습을 그토록 아름답게, 오묘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렘브란트는 비극이란 비극, 상실이란 상실을 다 겪고 난 뒤에야 ‘탕자의 귀향’을 그릴 힘과 영감을 얻게 되었으며,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실체를 꿰뚫어 보았기에 불후의 명작을 그렸던 것입니다. 그가 겪은 상실과 그에 따른 고통은 그의 내면의 모든 것을 비워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스펀지처럼 온전히 내면 깊이 흡수하고 수용해서 그런 빛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하느님의 자비를 묘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상실을 딛고 살아남은 법을 배우고 난 뒤 작품을 통해 그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어쩌면 이는 바로 렘브란트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같은 화란 출신의 저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는 이 작품을 보고 “수없이 죽음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스스로 죽고 또 죽은 끝에야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모릅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상실의 실체와 그 깊이를 복음의 작은 아들에게서 찾고 만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작은 아들은 집을 떠나기 전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빚을지 몰랐으며, 상실을 통해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는 우리 역시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그리고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실과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외적인 상실을 통해 그리고 관계의 단절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난 아직 돌아갈 집이 있고 그곳에 아빠가 계시다는 사실의 깨달음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이는 우리에게도 해당되고 적용되는 은혜로운 표현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려움 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죄송함으로 말미암은 내적 혼란과 갈등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신뢰 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집착과 부끄러운 수치심으로 주춤거리고 망설였겠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붙잡지 않으시고 “아들아, 가야 한다면 가거라. 다만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거라. 나는 네가 떠난 이 자리에서 네가 다시 오는 순간까지 너를 기다리마!”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마음과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는 돌아갈 용기를 갖고 자신의 발목을 묶고 있던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보따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빠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허용하십니다. 심지어 죄까지도,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허용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작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고 싶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풍부하게 내렸습니다.>(로5,20)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지만,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더 큰 사랑을 드러내기 마련이다.>(루6,47)고 말씀하셨지요.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작은 아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뜻으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15,19.21)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15,20.24)고 하시면서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용서를 위한 어떤 조건도 단서도 없었습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관계를 스스로 부정했기에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하였지만, 아버지의 시선에서는 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다만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시선에서 보면 집을 떠나기 전의 육적이고 거짓된 어제의 아들은 죽었고, 집으로 되돌아옴 통해서 영적이고 참된 아들로 새롭게 거듭난 것뿐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떠나고 난 후 미어지는 사랑의 아픔이 있었고 되돌아 온 이후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쳐났습니다. 단지 이별의 아픔보다 재회의 기쁨만이 그리고 비온 다음에 땅이 굳듯이 떠나기 이전 보다 부자관계는 더 돈독해지고 친밀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제 관점에서는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의 눈이 멀다시피 한 아버지가 아들을 눈으로 보았기에 알아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어루만져서 사랑하는 아들을 알아보았으리라고 상상하게 만든 아버지의 손입니다. 사랑에 눈 먼 아버지 그러나 가엾은 마음으로 아들을 어루만지면서 아들을 알아보신 것처럼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의 굽은 등을 어루만짐을 통해서 아실 것입니다. 등을 쓰다듬어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는 저 손이 바로 약손이며 생명의 손입니다. 이 아버지의 변함없는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짐을 아들도 느꼈기에 잔치에 함께한 사람들과 더불어 편하게 기쁘게 잔치를 즐길 수 있었으리라 상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잔치’는 ‘하늘나라의 잔치의 표징’이며,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누릴 하느님과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이제 곧 잔치가 벌어질 것이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시34,6./루15,31)
 
끝으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동구 밖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돌아오는 작은 아들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알아봤을까요?”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알아보았다.” 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한없으신 자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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