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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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 삶의 근거를 철저히 하느님 안에 두었고, 아버지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잃지 않으면서 죽어가셨습니다. 그렇게 죽어 가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은 참으로 예수와 함께 계셨고, 그 하느님은 예수가 가르쳤던 대로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면서,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표현하실 때, “나는 길이며 진리요 생명이다.”고 밝히셨습니다. 이는 곧 그분은 참된 진리의 길을, 생명의 길을 사셨던 분이시고, 그분이 사셨던 삶은 진리를 위한, 생명을 향한 삶이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은 온 존재로 사셨습니다. 사실 진리란 실존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살고 싶고 찾고 싶다고 하지만 사실인즉 그렇지 못합니다. 막상 진리를 만나고 살아야 할 때, 우리는 하나같이 꽁무니를 뺍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살기 위해 거짓된 허상이나 망상 그리고 아상에서 벗어나 진리를 위해 비우고 내려놓고 죽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우거나 버리고 싶지 않고, 죽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삶은 늘 억눌리고 짓눌린 상태에 머물러 살고 있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서, 사랑이 아닌 것에서, 생명이 아닌 것에서 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죽음과 대면할 수 있을 때, 곧 모든 이기주의 사고와 행동에 맞설 수 있을 때 자유롭습니다. 즉 자기만의 안락과 안전, 특권의 소유, 세상의 뻔뻔스런 불평등,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동의와 인정 등이 이기주의적인 형태들이지요. 인간은 이 모든 것에서 능동적으로 죽을 때, 즉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살고 행동할 때 자유롭습니다. 예수는 묵묵히 씨 뿌리는 농부처럼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행하심으로서 자신의 이권이나 이득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죽으셨습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희생으로서의 죽음만이 부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죽음은 유일무이한 사랑의 죽음이었고 죽음에서 해방되신 유일무이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즉 그분은 한 점의 앙금도 없이 자유로운 분이셨기에, 한 점의 찌꺼기도 없이 사셨기에 ‘죽으시면서 동시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썩지 않으셨다.’라는 사도행전 2,31절의 표현처럼,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엔 마땅히 소멸될 수밖에 없는 어떤 찌꺼기가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자발적인 사랑에서 내어주신 생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존재 자체임을 말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삶이란 생명을 사랑으로 내어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생명은 사랑이고, 사랑은 생명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며 생명의 완전한 표현이었지요. 예수님의 죽은 몸은 생명 자체요, 사랑의 완성입니다. 이 모든 사랑은 생명에 충만함에 대한 진리의 증거이시기에 그분의 죽음은 완전한 자유의 드러남입니다. 그분은 자유로운 분이신데, 무덤 속에 자유란 없습니다. 거기엔 찌꺼기들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어떤 것도 먼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점에서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사실 ‘부활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묵상은 예수님의 유혹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탄은 그분을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인 소유와 명예와 권력을 미끼로 유혹했죠. 그럼에도 그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했잖아요. 그래서 사탄은 마지막 때, 결정적인 때를 기약하며 물러갔다가 이제 그때가 되어 다시금 사람들을 도구로,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도구 삼아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유혹에 빠뜨렸죠. 그런데 그분은 다른 사람과 달리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우고 고통을 받아들이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것 하나 남긴 없이 다 비우시고 죽으셨기에 사탄마저도 어쩔 수 없는 그 ‘텅빈 비움’에 아버지의 생명으로 가득 찬 것이 곧 부활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을 고백하면서도, 사랑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 자유가 아닌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비우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죽지 못한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분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의 무덤은 아직 비어 있지 않습니다!

 

‘죽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체험은 가장 오래된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예상하거나 기대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부활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한결같이 ‘무서워 떨고’, ‘당황하고 의심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이 차츰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선포한 부활 증언 이야기는 그들의 선포가 조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그토록 일관되게 예수의 수난 사화를 기록한 제자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 이야기는 각자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점을 볼 때도 잘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르꼬 복음은 3명의 여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때 흰 예복을 입은 젊은이를 만나게 되지만,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고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2명의 여자들이 무덤으로 나갔으며, 그때 지진이 일어났으며 천사들이 ‘이를 알려라’고 하자 왔던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끝으로 루카 복음에서는 여자들이 향료를 가지고서 무덤으로 나아갔으며, 그때 두 사람이 목격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관 복음의 각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도 자료가 전혀 일치되지 않았고, 더더욱 당대엔 여성들의 증언은 증거 능력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목격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부활이 조작일 수 없는 이유는, 1) 제자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슨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와 순교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2) 제자들 역시 유다인으로 유일신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의하면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았다고 하는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3)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런 그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면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4) 바오로의 전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를 동조하고 동참했던 바오로가 그리스도 신앙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온갖 수난을 겪었습니다.

 

이를 전제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변화된 루카 복음의 엠마오의 제자들의 부활 체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루24,14-35)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우리의 영적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결정적인 신앙의 위기를 맞았지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신원과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어느 누구든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강도는 지금껏 살아 온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행복의 기쁨이 크면 그만큼 불행의 슬픔도 큽니다.’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동안 수많은 치유와 기적들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참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보내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충격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위기는 지나 온 삶의 탄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더더욱 위기의 순간에는 확신할 수 있는 것,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없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이 투명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갑작스레 모든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명료해졌습니다. 그로인해 제자들은 좌절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이야 말로 죽음의 순간이며 부활과 먼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길을 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클레오파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름 없는 또 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인 나와 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깊은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상태는 1) 영적인 맹목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24,16)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지만 영적인 맹목 상태에 있었기에 제자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였고,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흔히들 사랑하면 눈이 멀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그 무엇도 사랑 보다 눈이 밝지 못합니다. 눈이 먼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지요. 집착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자신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고 잘못 믿어버린 나머지 거기에 매달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집착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행복의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냅니다. 이런 제자의 상태를 마르꼬 16,12에는,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표현이죠. 우리 또한 제자들과 동일한 상태는 아닌지요? 예수님은 우리네 삶과 인생길에서 우리와 함께 늘 동행하고 계시지만, 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오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길을 걸어가면서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만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 깊은 슬픔의 상태였습니다.(24,17)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경험적으로 슬픔과 눈물은 타인의 존재와 위로를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처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이죠. 저의 경우엔 어머니의 죽음의 체험은 저에게도 동일하게 하느님의 현존과 위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리스도 추종의 길’을 멈춰서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슬픔의 상태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3) 실망의 상태였습니다.(24,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상대적으로 기대가 크면 그 충격도 정비례해서 크기 마련입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잉태합니다.”(1야1,15> 이처럼 지나친 기대는 실망을 낳습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기대나 요구는 세상적인 차원에서, 현세적인 측면에서 당장의 이득을 바라고 기적을 예수님께 요구하셨지만, 예수님은 더 높고 깊은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거부하였고 그로인해 실망한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까닭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며 거부하고 배척하고 죽이려는 게 인간의 나약함이고 어리석음일지 모릅니다.

 

4) 불신앙의 상태였습니다. (24, 22-24)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역시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 들일만한 믿음이 없었고 결국 스스로 불신앙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아버렸죠.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2코4, 7-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체념과 인내로 모순과 슬픔을 견디어 내도록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적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시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신 다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치유의 단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24,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늘 가까이 오시어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아볼 수 없는 우리의 맹목을 보시고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까요? 하지만 탓하지 않고 먼저 가까이 오심으로 은총은 시작됩니다.

 

2)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십니다. (24,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는 질문은 그들의 불안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문제를 지닌 사람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어찌하면 좋을지를 알고 싶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귀를, 시간을 내주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이 곧 제자들의 문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문제 핵심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억압하거나 회피함으로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면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모든 인간은 위기와 사건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사랑의 방법이며 선물입니다. 사랑은 결심이며, 그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3) 먼저 들으신 다음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24,25) 아직도 귀가 멀고 눈이 먼 제자들은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선입견, 고정관념 때문이고, 곧 그들이 아직도 영적 귀머거리이고 영적 장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볼 수 있게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들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치려고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주십니다. 성경은 사건의 해설이 아니라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입니다. 요한복음 5, 39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체험하고 그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부족하기에,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길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여유와 여백은 차츰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면서 마음이 뜨거워질 때 변화는 기적처럼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사랑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도록 기다려 줍니다.

 

절망에 빠진 자는 스스로 원해서 청할 때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을 때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방안을 찾게 됩니다. 말하면서 듣고, 들으면서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타인을 수용하고 초대할 때 이미 문제는 사라집니다. 자기 집착이나 집중보다 타인을 집중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풀리게 됩니다. 또 초대받은 자가 초대하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즉,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때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 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집중하면서 늘 주님께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주님을 모실 때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나누어주시고,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를 봄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고 난 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체험을 알리기 위해 떠나왔던 형제들에게 되돌아갔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처음 떠나왔던 삶의 자리, 갈릴레아로 되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1) 전례 감각을 회복합니다. (24,32-35)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을 체험하면, 우리도 지금껏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전례 참석에서 생기 넘치고 생명이 충만한 전례 정신이 되살아나서 지금 여기 살아 계시고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기쁨의 회복입니다. 부활 선물은 기쁨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인한 기쁨입니다. 감격과 감동 의식을 상실했다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기쁨을 되찾게 됩니다. 기쁨은 나누어야 하고, 나눌수록 더 확장되고 전염되어 파급되어 퍼져나갑니다. 3) 친교의 회복입니다. (24, 33절) 공동체 형제들이 함께 다시 모였습니다. 친교는 부활의 가장 확실한 선물인 성령강림의 결과입니다. 언어, 피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에도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만듭니다. 부활체험은 사랑과 친교의 진실성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를 봄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우리의 친교와 나눔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며, 이것이 부활의 새로움입니다.

 

이처럼 부활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굳게 하고 체험한 바를 나누고 증거 하게 하며, 생명을 얻게 합니다. 기쁜 소식 곧 부활 체험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마음을 밝게 하고 따뜻하게 합니다. 그래서 위기와 절망에서보다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는 은총이자 생명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라는 말은 빈 무덤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죽음의 장소에서 예수를 찾지 말고 생명의 자리인 일상의 삶의 자리로 나가라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진리가 아닌 모든 것, 생명이 아닌 모든 것을 비우고 그분이 하신 일을 계속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도, 죽으실 때도 자신을 전혀 챙기지 않으신 분이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만을 챙기지 말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베풀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두 차례 폴란드 성지 순례를 하면서, 아우슈비치 수용소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을 찾으면서 저는 성 막시밀리안 콜베신부가 다른 사형수를 대신해서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도 좋겠습니까?’라는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는 한순간 감정적인 상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가 평소 주님의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체험한 사랑에서, 예수님처럼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을 실천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미 그는 성체와 성혈의 사랑의 신비를 체험했으며,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었기 때문에 기꺼이 타인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변모된 모습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콜베 신부는 이미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도 좋겠습니까?’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았으며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예수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 안에 그것을 되살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 실천을 통해서 또 하나의 예수 살기를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의 삶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그로 인해 예수의 현존을 체험한 바를 나누고 증거 하게 하며, 다른 이에게 생명을 얻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게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선포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과데말라 출신 시인 ‘홀리아 에스퀴벨’의 “그들이 부활로 우리를 위협했다.”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우리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 내면의 깊은 곳에서 계속 두드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라오.

 

남편을 잃은 인디언 여인들의 숨죽여 흐느끼는 울음, 기억 너머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서글픈 눈망울이라오....

 

우리를 계속해서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부활로 우리를 위협했다는 것!

이유는 1954년 이후 매일 저녁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피살자 명단이 몸서리쳐지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삶을 사랑하고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오.

 

이런 희망의 마라톤 속에는 언제나 우리를 구해주는 타인들이 있어서 죽음 너머에 있는 결승점에 닿도록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로 와서 같이 밤샘을 하셔요.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꿈꾸어야만 하는지를 알게 되지요. 그러면 부활로 위협을 당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오. 깨어서 꿈을 꾸고 잠들어서도 지켜보고 죽어가면서도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이미 부활했다는 것을 아는 것!>

 

시인은 말합니다. 부활 체험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라오.’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바윗돌을,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마르16,3)라고 고백했던 부활의 첫 목격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있는 바윗돌을 굴러 내주는 영을 만나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고 그 부활을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만이 아직 부활을 체험하지 못해서 자신의 이기심에 갇혀 빛보다 어둠 가운데, 희망보다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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