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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박나무 posted Jul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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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잖아도 날이 더워 진이 빠지는 참인데 ‘억울한 소식’ 은 이 세상살이를 더 씁쓸하게 했다. 토마스 모아가 읊었듯이…….

 

우정이 끝나고,

화려한 사랑의 반지에

보석들 떨어져 나가고,

진정한 사랑 죽어 묻히고,

좋은 것 모두 사라져 버리면,

아! 이 쓸쓸한 세상에 누가

혼자 남아 살 것인가?

 

흔히들 생각하듯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걸작들이 도박 빚을 갚느라 하루하루 쫒기며 썼던 것이라 하지 않던가. 뭔가 모자라고 부족한듯한데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 엘리사의 이야기가 그렇고 오병이어도 같은 맥락이다.

 

서품을 받고 꼬박 3년째 서울 명상의 집에서 피정을 지도하다가, 시간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쉬는 월요일 오전에 장미원 한 팀, 오후에 삼양동 달동네 한 팀을 만들어 유학가기 전까지 마르코 복음과 창세기를 공부했었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역시 없이 살던 삼양동 사람들의 나눔이 풍성했었다. 분명 어느 면에서나 모자랄 것 같은데 오히려 결과는 반대였다. 이런 생생한 체험은 공동번역 창세기 13장의 아브람과 롯에 대한 말씀에 눈이 가게 되고 마음에 새겨졌었다. “6 그 지방은 그들이 함께 살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들이 지닌 재산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흔히들 생각하듯이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이상적인 좋은 왕(정치가) 이란 너무 많이 가진 자도 없고 너무 가진 것이 없는 자도 없게끔 공정하게 다스리는 자다. 예수는 헛된 기대에서 비롯된 인기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지만, 빈익빈 부익부를 더욱 조장하는 듯 한 현실정치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그들이 산으로 들어가 칩거하는 것은 시절이 하수상하니 잠시 후퇴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다. 여차하면 ‘백성을 위합네“ 하며 권력을 움켜쥐려 하산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많은 정치인들이 백성을 위한다 하며 실은 가진 자들의 갑질을 신장, 옹호하며 을과 병들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길을 열어주는 풍토에서 고군분투하다 쓰러진 그를 하느님은 자비로이 받아주시리라 믿는다. 비유의 달인이었던 고인의 아마도 마지막 비유일 것 같다. 삼성 바이오로직스의 고의 분식회계(사기)를 두고 금융위원회가 하고 있는 짓거리는, 현장에서 붙잡힌 살인강도를 ‘주차위반’으로 입건하는 것과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