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금요일

by 언제나 posted Apr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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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방송 매체에 ‘○○ 끝장 토론’이란 타이틀을 달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결론을 짓자는 의미이지만 대부분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계속된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의 논쟁은 오늘도 이어지는데, 그 발단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Jn 10,31)는 물음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유대인들의 주장이 쏟아집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돌을 던지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라는 말로 자신들이 하려는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전혀 다른 시선과 접근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문은 왜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알고 계심에도 굳이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을까? 결론을 낼 수 없는, 어떤 교집합도 타협점도 찾을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의 관계인데 ‘왜’, 의문의 결론은 결국 그들에게 향한 증언이라기보다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향해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10,42)는 언급에서 빛을 봅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활동의 근거는 바로 아빠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이유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니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확고한 태도로 유대인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일들 곧 사람을 살리는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10,38)고 말씀하십니다. 허나 그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무지와 불경한 신성모독 때문이었습니다. 파견하신 아빠 하느님과 파견되신 성자 예수님은 사랑과 생명으로 한 분이시며, 같은 분이시기에,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보는 것은 보이지 않으신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예수님의 일은 곧 아버지의 일임을 믿는 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요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