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월요일

by 언제나 posted Apr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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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느 잡지의 신간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라는 책 제목이 신선해서 기억하게 되었는데, 책 저자가 <이 라영> 이더군요. 그녀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나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니라 사람대접 받지 못한 사람들의 사람 될 권리를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라는 책을 집필했다고 하네요. 저의 관심사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 제목이 가져다주는 영감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펼치시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시는>(이42,3.6)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그 가족과의 친밀하고 돈독한 관계에서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자비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무슨 칭찬이나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다시 살아난 것’에 감사하면서 기쁨과 환희에 넘친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넘친 잔치 가운데 특히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은 비싼 향유 보다 더 귀하고 귀하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환대의 표시이며,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음은 그들 가족의 생명의 ‘빛이요 구원이신’(시27,1참조) 예수님께 대한 애절한 감사와 報恩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충분히 <환대받을 권리>가 있으며, 마리아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환대할 용기>를 지닌 여성임이 드러납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 가운데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은가?>(12,5)라고 빈정대자, 예수님께서 평소와 달리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12,7)고 옹호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내 주는 것 곧 사랑의 낭비임을 마리아는 알고 실천한 것입니다. 사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로 믿는 사람이 늘어났고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그 날이 이미 임박했음을 감지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바로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12,8)고 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이며, 이를 빙자해서 이웃을 돌보는 일을 미루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 비싼 나르드 향유를 당신 발에 붓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장례를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저희들의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